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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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꼬라지(!) 알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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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osspaolo] 쪽지 캡슐

2002-01-01 ㅣ No.3097

요즘 들어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정체성 혹은 Identity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꼬라지>라고 번역하면 된다.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우리 모두가 언제나 던져봐야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문제를 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깨달아야 한다.

다시말해

<너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한단 말이다.

 

그러나 이 답은 쉽지 않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어떻게 알겠니?>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고,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는 할지언정

진짜 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나에 대한 질문은 모든 수도자들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가보다.

 

그런데

이 나의 신원에 대한 답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로부터

계속해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오?>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에

요한은 <나는 누구요?> 하고 바로 답을 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나는 누구가 아닌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엘리아가 아님을,

그들이 기다려야 할 분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부정적인 응답들을 통해서

점차 나의 신원이 확실해지게 된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소리일 뿐>이요 <청소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 길은

요한처럼 부정적인 식별방법을 통해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내가 아닌 것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아닌 것을 정리하게 되면

보다 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양 은근슬쩍 넘어갈 때가 있다.

강론을 마치고

묵상글을 올리고

때론

많은 이들로부터 과분한 칭찬을 받을 때가 있다.

아마도 칭찬하는 이들은

나보다도 나를 통해서 주님을 칭송하는 것일진대

어리석게도

그것이 나를 칭찬하는 것인양 착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머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바라보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느님, 당신은 누구신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깨달아 갈수록

하느님 그분이 누구이신지도 보다 명확해 진다.

 

내가 그렇게 거창하고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가면 갈수록 내 꼬라지를 알게 되고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된다.

요한은 자기 꼬라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메시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내 꼬라지가

대단하지 않다고 섭섭해 말자.

내 꼬라지가 죄투성이고 보잘것없음 투성이임을 깨달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뵙는 은총의 순간임을 믿자.

 

새해는

이렇게 내 꼬라지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하느님을 보다 분명하게 만나고 체험하는 해로 삼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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