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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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당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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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7-24 ㅣ No.4193

              고소당한 신부

 

정든 시골본당

때는 1967년, 1년간의 보좌신부 생활이 끝나고 주임신부로 발령이 났다.  

마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보좌생활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보좌에서 주임으로 승진되었다는게 한량없이 기뻤다. 신부생활 중에 제일 기쁜 때가 있다면 처음 본당을 맡을 때 아닐까.  부산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가면 나의 첫사랑, 첫본당인 거제성당이 나온다. 정 주교님의 고향 본당이기도 하고 거제도에서는 꽤 오래된 성당이다.  젊은 패기로 사목 생활을 한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재미있었다.  

신자들과 논에 벼도 심고, 논매기도 하고, 가을 타작도 하고, 공소순방 및 가정방문 등 모든 일에 흥이 났다.

 

오토바이사고, 이크!

 공소에 있는 환자의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본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본당과 공소 간 거리는 30리 정도였는데 도로가 요즘처럼 포장되지 않아 자갈길이었다.

사람도, 오토바이도 모두 차가 지나다니면서 만든 두 줄의 바퀴 자국으로만 다니는 형편이었다.

내 앞에 두 청년이 차바퀴로 생긴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어렵게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그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클랙슨을 눌렀지만 길을 비켜주지 않아 옆으로 그들을 지나치려다가 그만 오토바이가 한 청년을 살짝 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혼자요, 그들은 둘이라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는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심한 욕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xx새끼’를 비롯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단단히 무안을 당했다.

그 날이 금요일이라 본당미사를 집전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뭐라 대꾸도 못했다.

 

억울함을 꾹 참고 본당에 와 저녁미사를 드리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미사를 드리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교우들을 등지고 서서 미사를 드릴 때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신자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며 꼬치꼬치 이유를 물었고 결국 난 그 날 일어난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찾아달라고 몽타주를 그려주었다.

 

한 달쯤 후, 그 사람이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사제관으로 온 그를 보니 그때 그 울분이 폭발하여 나는 마구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었기에 생각도 없이 그의 얼굴을 때렸고 그의 눈은 퉁퉁 부었다. 잘 안보이는 엉덩이나 다리를 때렸으면 그 정도로 사건이 학대되지 않았을 텐데 눈이 부어 오를 정도로 때렸으니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는 이웃 면에 사는 사람이고 농협 조합원이었는데 아침에 멀쩡히 출근했던 사람이 저녁에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왔으니 그 동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

그 동네 사람들이 성당으로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에 나는 그냥 있으면 맞아 죽을 것 같아 피신하기로 했다.

다행히 소문처럼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닷없이 창원지검 충무지청에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가 나를 상해죄로 고소한 것이다.

지청으로 출두하니 그는 벌써 와 있었다.

검사 앞에 가기 전에 우리는 화해를 했고 검사 앞에서 화해조서에 도장을 찍고 좋게 헤어졌다. 그러나 나는 벌금으로 5000원을 물어야  했다.

그때 미사예물 1대가 500원이었고 주방 근무자 월급이 1500원 정도였으니 죄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신부인 주제에 사람을 구타하고 고소당하고 벌금을 물고 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마태 5,25)는 성서 말씀을 실천해 본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신자들에게 늘 "회개하시오"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복음 말씀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이 일으킨 2가지 여론

첫째, 천주교 신부가 사람을 때릴 수 있나? 나쁜 여론이다.

둘째, 오죽 했으면 신부가 때렸겠는가? 온건한 여론이다.

 

한마디로 맞을 짓을 했기에 맞았겠지 하는 여론이었다.

둘 다 일리가 있지만 그 좁은 시골에서 사목자로서 명예가 회복되지 않으면 사목하기가 매우 힘들기에 주교님은 나를 다른 본당으로 이동시켰다.

 

나의 결심

이 구타사건은 36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내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마냥 부끄럽고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만나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첫째, 절대로 화내지 않고,

  둘째, 절대로 악에 대항하지 않으며,

  셋째, 절대로 사람을 때리지 않겠다고.

  오늘도 나는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 한다.

 

          손덕만 신부/1965년 사제서품 현재 부산교구 주임신부

              Catholic Digest Korea에서 옮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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