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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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 끝장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 . . [신용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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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jangmee] 쪽지 캡슐

2007-10-03 ㅣ No.30536

 
 
 
 
 
 
 
 

여섯 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선 어느 성당,

돈 한 푼 없어 치료 한 번 꿈꾸어보지 못한 채 백혈병으로

주님 품에 잠든 어린 아이의 장례미사 후,


모든 신자가 빠져나간 한 구석에 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 으로서 울고 있는

한 젊은 사제를 만난 충격!


"신부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울어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란다."

하시던 어머니 말씀.

그때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사제상으로 새겨졌다.


초등학교 6 학년,

그 말씀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남루한 옷차림에 말도 통하지 않아 '왕따' 인 한 친구.

나 역시 다가갈 자신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겠니?" 하신 어머니 말씀에

'냠냠클럽'을 만들어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 일쑤인 녀석을 위해

돌아가면서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갔다.


열 칸짜리 노트를 사서 쉬는 시간마다 한글을 가르쳤다.

'ㄱ'을 가르치는 데 한 달,

'ㄴ'을 가르치는 데 3주...,


뜨거운 눈물이 고인 졸업식,

그 아이가 건네준 노트 끝장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


'나 같은 친구 위해 일하는 사람 꼭 되어줘!'


기적이었다.


"그래, 그럴께!"


그러나 신학교를 가려던 내게 전혀 다른 삶의 길이

준비된 듯 했다.

본당신부님과의 면담 결과

복잡한 가정사정으로 인해 사제직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처럼 우울한 어머니의 모습을 뵌 적이 없다.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 앞에서 침묵과 기도만이

청천벽력처럼 무너져 내리던 허허로움을 달래주었다.


고민 끝에 평신도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낯설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가슴 한구석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신부가 못 되더라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그 한 길에 응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주님은 정작 무엇을 원하셨는지...,

고 2, 한창 열을 다해 공부할 즈음,

갑작스레 당뇨병으로 쓰러진 어머니,

몇 달 후 아버지처럼 사랑해 주시던 이모부의 요절,

그리고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오른쪽 눈,

입시를 불과 2개월 앞두고 급우의 자살까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험한 길에 내몰린 어린양처럼

절박한 심정이었다.

결국 원하던 전공과는 다른 학과에 합격하고

점점 세속의 길을 걸었다.


겨우 주일 미사만 참여하는 신앙생활,

헛된 모임에 젖어 찌든 모습...,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숨어계신 주님의 손길은 다시금 잃어버린 나를 찾도록

섬세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피로에 절어 지하철 한구석에 널브러지듯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 손 위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옛 친구의 걱정스런 눈길.


"너 왜 이러고 있니?

 너 신학교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니?"


속내를 털어놓은 대화 끝에 찾은 곳,

[형설야학]이라는 간판 앞에서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


13세부터 50대 중반까지

저마다 배움의 한을 품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책을 펼친 모습,

망설임 없이 따뜻하게 품어주던 환대,

가난한 이웃의 내음,

'빛을 기다리는' 그들 틈에서 점차로 평안을 찾아갔다.


주님 다시 불러만 주신다면...,


그들과의 몸부림 속에서 다시금 지펴지는 작은 성소의 불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살다 졸업을 앞두고

우연히 미리내 성지에 갔다.

어머니 말씀에 못 이겨 술 약속을 미뤄두고 간 곳이니 만큼

무언가를 찾으려는 맘.

그냥 그 맘을 비우려는 교차된 심정을 안고서...,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성소가 있어 왔느냐는 말씀에 넋을 잃듯  "그렇습니다!"

응답이 내 입에서 새어나오고 기쁨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 환희는 바로 다음날

변화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할머니의 교통사고,

어머니의 대장암 진단!

평생 든든한 보루요, 영적 스승이며 다정한 연인이자

맘을 열 수 있는 영원한 친구 어머니와의 이별을 앞에 두고,

담담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슬픔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시편 139,1)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주님 곁으로 가시려는 어머니의 영적 정화를 권유하시던 분의

말씀을 따라 꽃동네에 오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가난을 통해 가난을 알게 하시고

눈물을 통해 눈물을 품게 하시고

용서를 통해 용서하게 하셨으니...


질그릇에 보화를 담으시듯

나의 좁다란 가슴 언저리라도 내어주어

가난한 이의 가슴이  내 가슴이 되어 함께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계획에

내 마음 전부를 담아 순명하련다.


영적, 육적 상처가 곪아

썩는 냄새가 나는 이 자리가 달갑다.

 

“내가 당신 곁에 있음으로 당신 발아래 무릎 꿇을 수 있는 것은

  가난한 당신 안에서 끌어안아 주는 그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꽃동네 가족 누운 침대 곁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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