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쓸모 있음과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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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옥 [songdo] 쪽지 캡슐

2002-01-20 ㅣ No.5510

매일 메일(mail) 서비스에서

[오늘의 †복음]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그 때에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분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레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1,29-34)

[쓸모 있음과 없음]

어느 날 장자는 제자를 불러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어젯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 다녔는데,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었다.

깨고 보니 나는 나비가 아니라 내가 아닌가?

그래,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보니 분명 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알쏭달쏭한 스승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의 이야기는 실로 그럴듯하지만

너무나 크고 황당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대답했다.

  너는 쓸모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는구나.

그러면 네가 서 있는 땅을 한번 내려다 보아라.

너에게 쓸모 있는 땅은 지금 네 발이 딛고 서 있는

 발바닥 크기만큼의 땅이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너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딛고선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땅을

없애 버린다면 과연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작은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제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자

장자는 힘주어 말했다.

  "너에게 정말 필요한 땅은

네가 디디고 있는 그 땅이 아니라 너를 떠받쳐 주고 있는,

바로 네가 쓸모 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부분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삶이란 바다에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

낭만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서로의 눈빛을 통하며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흐르는 계절을 따라 사랑의 거리를 함께 정답게 걸으며

하고픈 이야기를 정답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놓을 수 있으며

마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편안히 눕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소유할 수 있으며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나누며

함께 꿈을 이루어 가며

기쁨과 웃음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울타리 안에

평안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삶이란

들판에 거세지 않게

가슴을 잔잔히 흔들어 놓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의 어린양 모습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즉,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 종의 모습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지요.

그보다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받으시는 동시에

이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하는

엄청난 불충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을까요?

아니면 그냥 느낌에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술을 감정하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명 감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매일 조금씩 조금씩 감정하다 보면

술이 혀끝에만 닿아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음악가도 마찬가지이지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은 모든 악기의 음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하지요?

아마 하루 이틀에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듣고 또 들어서 정확히 도레미파솔라시도 중에

어떤 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듯 예수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예수님을 세상에 제대로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마치 야구선수가 볼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농구선수가 정확한 슛을 하기 위해

수많은 날을 쉬지 않고 연습하듯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도

매일 그렇게 노력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노력없이 하루 아침에

하느님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무런 연습 없이 명 선수 혹은 명 연주자가

되어 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매일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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