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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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 하느님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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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232.133.*]

2007-11-27 ㅣ No.6066

 *  성 바오로 수도회 백 신부님의  ' 하느님의 부재 '  *
 
하느님의 부재 체험은 비단 마더데레사 뿐만 아니라, 앞선 모든 성인성녀들, 열심한 신자들 모두가 겪을 수 밖에 없는 신앙성장 과정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마르 15,34) 라고 절규하시면서 예수님이 죽으셨지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의 부재체험이고, 또 마더데레사, 오늘날 우리의 부재체험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부재체험은 예외없이 누구나 겪게 되어있습니다. 단지 그 형태와 정도와 때가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부재체험은 상당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섭렵할 수 없고, 생각나는 것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원죄를 지은 이후부터 원초적으로 이기심에 물들어 있습니다.
제아무리 선하게 살더라도, 또 은총을 풍부하게 받아 살더라도 삶의 밑바닥에는 은밀하게 이기적인 흔적이 남아있지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스러움을 깊이 통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깊이 일치할려고 할 때 누구나 자신의 어둠과 어두운 이기심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우심으로 당신의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이 마지막 어둠의 찌꺼기를 비우시고자 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대개 하느님의 부재체험 혹은 하느님의 절대침묵 체험으로 나타납니다.
이럴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마른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서 그러면서도 의지적으로 의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성인성녀 전기를 잘 읽어보면 이러한 순간의 생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픔이고, 고통이고, 피하고만 싶은 순간이지만, 성서가 가르쳐주는 바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양대로 우리는 그저 마른 믿음으로 앞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어둠속으로 뛰어드는것입니다. 바로 이때 신앙은 완전해지고, 완전히 순수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내다보고 현재의 삶을 준비하고, 마음준비를 하는거지요. 우리는 멀리내다 보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영원을 내다볼 줄 아는 영원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절규를 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좋은 표양의 말씀을 주셨지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 26,39)
고통과 죽음을 피하고 싶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셨고, 그러나 이어서 성부의 뜻에 온전히 내맡긴 것입니다. 죽음 그 순간에서도 성부의 자비로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비롭지 않게 보이는 극단적인 그 순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성인은 순교사실만 확실하게 입증되기만 하면 곧장 성인품에 오르는 것입니다. 순교신앙은 바로 하느님의 부재체험이 그토록 이르는 그때, 또는 하느님의 절대침묵 체험이 절정에 이르는 그때에 나의 의지로 믿음을 바꾸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더데레사가 훌륭하다면 그분의 봉사활동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 탁월한 활동속에서 엄청난 신앙의 부재체험에 이르렀고, 그순간에 마른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현존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에 마더데레사의 위대함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를 퇴로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아부치시고는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는냐?' 라고 물으십니다.
비단 마더데레사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가올 이러한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미리 준비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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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신부님의 말씀으로 님의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하느님의 부재란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신앙체험인 만큼  제 경험을 조금 더 덧붙입니다 .
님이 말씀하신 일반 신자들이 자신들의 죄책감이나 회피로부터 스스로 판단하여 느끼는 기도의 무응답과 하느님의 부재는 다릅니다 .   당연히 하느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단순한 자기반성 ,  자기성찰의 고통과도 철저히 다릅니다 .
하느님의 부재는 ,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현존에 밀착된 친밀감으로부터 기인하는 만큼 그분의 부재를 통해 느끼게 되는 고통은 자신이 회피하거나 반성하는 선에서나 느낄 수 있는 충족되지 못한 어떤 ' 결핍 ' 의 고통이 아닌  ' (대상) 상실 '  의 고통입니다 .
사랑했던 상대와의 이별뿐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 익숙하던 환경이나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신봉하던 이상이 무너질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 .. 혹은 그 모두를 한번에 경험하는 것과 같은 고통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을 부모처럼 여겼다면 그때의 마음상태는 ,  마치 어린 아이가 혼자 심통으로 토라져서  잠시 부모의 사랑을  못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 길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부모를 잃어버려 미아가 된 심정으로 불안하고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 
그래서 어느 때보다 더 울부짖지만 찾을 수 없는 절망감에 ,  그것이 단순한 무응답이 아닌 상실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 
그때의 두려움 , 슬픔 , 원망 , 분노 , 절망 그리고 체념 . .  그것들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찾을 기대를 놓지 않는 것이 위의 신부님이 말씀하신 의지적으로라도 선택해야 할 부재체험중의 ' 마른 믿음 '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는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부재의 고통은 믿음에 비례하기 보다는 은혜에 비례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
내 믿음이 크기 때문에 그 고통이 깊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은혜가 깊었던 만큼 그 공백이 커서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
그래서 그 부재를 견딜 믿음이 없어 심적으로 사지가 다 잘려나가는 만신창이가 되고서야 .., 또 종교가 가진 자기 위안의 최면마저도 다 걷히고 나서야 , 비로소 그 어둠속에서 진정한 내 ' 신앙과 종교 ' 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
평범하게 예나 갖추면서 적당히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  아니면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하는 원망속에서 , 그렇게까지 잔인하고 매몰차게 방치하고 외면하는 그분때문에 영혼마저 유린당한 느낌으로 하느님을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
내가 몰렸던 벼랑끝에서의 현기증만큼이나 하느님의 부재는 제게 치명적이었지만 , 동시에  그만큼 집착하는 내 안에서 신앙의 의미는 순수해질 수 있었습니다 . 
 
하루에도 수십번씩 힘들게 내 의지로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  저는 더 이상 신자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    
하지만 그렇게 수십번씩 마음에선 전쟁을 치러도 이제서야  진정한 신앙을 놓고 고민하는 '신자' 가 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렇게 오래 하느님을 믿어왔다고 하면서도 정작 믿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  무언가를 신앙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두려운 일이라는 것도 지금에서야 느낍니다 . 
역설적이게도 이 지경에서까지 하느님을 믿어야만 하는지 고민하고 상처받았던 하느님의 부재를 통해 ' 믿음 ' 을 봤고 이제서야 그 믿음안의 ' 하느님의 실재 ' 를 봅니다 .   
그리고 여기에 주님이 보이신 표양대로 하느님의 부재를 믿음으로 딛어야만 하느님의 실재를 체험하게 되는 진정한 신자의 자리가 있다고 느낍니다 .
 
신부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 
그때에 님은 준비된 자세로 그 부재의 고통을 줄일 줄 아는 믿음에 현명한 분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였습니다 .
 
* 주님은 완전한 때가 되기 전에는 묻지 않으십니다 . 아주 드물게 ,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  주님은 우리를 피할 수  없는 자리로 데려가셔서 폐부를 찌르는 질문으로  우리를 아프게 하실 것입니다 .      
주님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해 주십니다  . 그러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더 깊이 ,  주님을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        -   오스왈드 챔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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