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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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그리고 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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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용 [pmy0526] 쪽지 캡슐

2004-10-08 ㅣ No.11642

제 나이 쉰 하고도 넷 되던 작년 오월,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둥머리가 되었습니다.

무슨 구도의 길을 걷기 위해 삭발 한것도 아니요,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한 결연한 표시로 깍은것도 아니랍니다.   오직   "급성 골수성 백혈병"   항암 치료를 받아 온몸의 털이란 털이 몽땅 빠저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새 사업으로 재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던중 시작 한달만에  쓰러진 저는 후송에 후송을 거듭한 끝에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이송 되었습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병원 문턱 한번 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기에, "ㅇ"시의   이름있는 대학병원서 조차 치료할 수  없다며 긴급히 서울로 이송 시키는데도, 별것 아닐텐데        호들갑 떤다며  짜증만 냈습니다.   타는듯한 갈증,  사십도를 넘나드는 고열과 두통 또 아랫배에 가해지는    기절할듯한 아픔으로 몸부림 치느라 두군데 병원서 이미 백혈병으로  사형선고를 내려 아내가 공포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시로 간호사들이 커다란 주사기로 피를 뽑아가더니 다음날은 골수까지 뽑아갔습니다

그리곤 다음날 형제들 포함해 가족 모두 담당 교수님 방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참 별스럽다. 도대체 무슨 암이 걸렸길래 이런다냐?"  제가  꽤 똑소리 난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인데

골수까지 뽑아갔는데도 백혈병의 백자도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응급실 문앞에서 아내는 가족들을 들어 오지 못하게 막고는 넘어질듯 위태롭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습니다.

부여 잡은 손으로 온몸의 떨림이 전해 왔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여보, 무슨 병이래?"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더니

"........저...... 있잖아......., 치료만 ...잘....하면  낫느데......그러니......"

"글쎄 병명이 뭐냐니깐?"

"........그....급성........골수...성...........배...백혈...병"

"백혈병?,  내가?  웃기고 있네.."

순간 웃음이 터저 나왔습니다.

"정말...이야......    치료....받지 ....않으면....... 삼...삼개...월을........" 터지려는 오열을 애써 삼키며 아내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잠시후  심장이 터질듯 요동치며 화산이 폭발 하는 듯한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내가 왜?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성인 군자는 아니더라도 내 나름대로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병에 걸려야돼?    왜 죽어야돼?  왜 나냐고,   왜 왜~~~~~   발악 하는 눈앞으로 관, 영구차, 상복입은 아내와 딸, 화장터.... 서로 엉켜 어지럽게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당신도 나를 버렸는데 내가 못버릴 이유가 없다며, 뮨병온 이들이 기도하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내며 거절했습니다.  이일과 치료를 거부하는 나로 인해 아내는 많이도 힘들어 했으나  한번 닫힌 맘은 열릴줄 몰랐습니다.

어느날 저녁무렵  냉소띈 내 눈길을 온몸에 받으며 구내 성당으로 나를 끌고간 아내는  제대앞에 앉아 한참을

흐느껴 울었습니다.   결혼해서 지금껏 그 지독한 역경의 고통속에서도 눈물 한번 보이지 않던 아내가

그렇게 서럽게 아주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그날밤 간이 의자서 새우잠이든 아내를 바라보며 동이 틀때까지 아픈 회한을 반추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출근하려는 아내에게 "치료 받을께, 근디 병원비는...?" 

아내는 그냥 손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씩 웃더니 병실을 나갔습니다.

 

4차례 걸친 입원과 퇴원,반복되는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 그리고 골수이식까지

9개월에 걸친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치료를 이 악물고 견디에 낼수 있었던건 아내가 씨익 웃으며 출근한날 오후전화로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라고 해준 그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살아야 했습니다   악착같이 살아야 했습니다 

집이 있는 금촌에서 서울 미아리 직장까지, 중복 장애가 있어 삼시 세끼 먹이고 귀저기 갈아야 하는 누워만     있는  큰딸의 온갖 수발 , 입시 준비 중인 작은딸 거두기,  또 내 병간호......  그 가녀린 육신으로 어떻게

그 혹독한 역경을 헤처나왔을까?  그래도 그 긴시간 동안 아내는 다신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녹음이 너무 싱그러운 날엔 그 푸르름 때문에, 비오는 날엔 너무도 쓸쓸해서, 단풍이 들땐 너무 고와서

흰눈 내릴땐 둘이 거닐던 추억이 생각나서.... 운전하던 차를 길가에 세우고 "이 나쁜놈아" 하며 대성통곡을    하곤 했노라고 훗날 말했습니다.

"이 바보야, 차라리 도망이나 가지, 어찌 그 고생을 하며 날 살려 냈다니?"

"우린 가족이잖아, 어떠한 경우라도 가족은 포기할수 없는거니까"

아내는 날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직도 3~4년 더 병원 다니며 경과를 지켜봐야 하나 지금 이순간 가족들 곁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경제젹 도움을 주신 믾은분들께 고마움의 인사를 올리며, 투병중이신 환우분들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팔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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