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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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저 천하의 몹쓸 불효자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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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03.132.188.*]

2007-06-30 ㅣ No.5546

프로테스탄트교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청원해보세요.

먼저 침묵이 소중합니다. 이로써 내 마음속의 바리사이와 율법주의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이와 논쟁을 할 때 먼저 기도가 부재한다면 어떠한 바리사이도 율법학자도 스스로의

죄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바쁘고 악에 물든 현대 사회를 대처해 나가려면 먼저 조용히 주님안에 의탁하고 기도함은 신앙인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성부와 성모님께 대한 예절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도 점차적으로 지상의 부모님을 향한 예절로도 진화 될 것입니다.

 

오늘도 대중에게도 천주교가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사유로는 정통성, 정의성, 온유성, 청빈성, 유연성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다 부드럽고 지혜롭게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이 잘 안될 때가 많을 것입니다.

 

피빛 순교(홍색 순교)자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심지어 해미성지 순교자들은 하도 죽여야 할 대상이 많아서

열명씩 구덩이에 묶어놓고 큰 돌을 내려찍어 으깨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순교자들은 틀림없이 인간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저들을 위하여도 기도하며

순교자의 팔마를 얻었을 것입니다.

 

백색 순교(성직자)자들의 입장도 함께 헤아려 보십시오. 저역시 때때로 나약하고 죄많은 우리에게 심오하고 깊은 성경의 주파수 대신, 보다 쉽고 친숙한 목사들의 그것처럼의 강론을 요구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이때는 내가 사심이 앞설 때였고 지금은 말씀의 분위기 자체가 좋은 때로 돌아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정화시켜 주시기에 우리가 사심을 초월하는 공심제의 몸과 마음의 정화를 통한 최상의 기쁨중에 있을 때는 순교의 고통도 틀림없이 즐겁게 다가올 것입니다.

 

녹색 순교(일상안의 우리들의 순교)도 묵상해 보십시오. 도무지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에 어떤 때는 숨만 쉬어도 두려움이 앞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미소를 보내줄 수 있을 때와 그렇치 못할 때의 차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때의 침묵과 고통은 살아있는 자에게 성령의 열매가 되도록 더욱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용기도 회복시켜 줍니다. 기도를 통하여 보는 세상은 내가 과거 불목하였던 형제와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천사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기도가 부족할 때는 부모도 천사도 나를 방해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로 보이지만 돌아보면 이들이 또한 천사임을 일깨워 주심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 때에 나는 그 모든 미사여구보다 무조건 그들을 만나러 쳐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대처할 수도 있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이 더 상처를 주는 것도 내가 부족하고 또한 내탓이기 때문입니다. 가깝기에 더욱 더 긴장하고 더 가꾸고 사랑해야 할진데 나를 내려놓치 못하여 신약보다 구약에 얽매이고 또한 지난날의 나의 습성의 노예가 되기도 하는데 침묵으로서 그러한 악의 요소들을 굶겨 죽여보십시오. 단 한시간만 하여도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모른채 덤빌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침묵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입니다.

 

침묵도 참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침묵은 수많은 은총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순명의 열쇠도 침묵안에 놓여있고 늘 함께 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도 침묵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침묵은 사랑이 담긴 움직이는 침묵으로도 진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다니는 부모님께는 3살이 넘어 자립심을 가져야 하는 자녀로써 같은 교회를 다니는 것 좀 더 여유를 갖고 묵상해보시길 권합니다. 일단 주님의 작은 교회이며 교회의 요람인 가정에서 함께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 말씀 나눌 수 있도록 해보십시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도가 부재한 대화는 허무할 수 있으니 이 기회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것만 해도 커다란 은사의 열매로 이어질 것입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으며, 늘 권위적인 부모님 앞에서 떨었던 것도 따뜻하게 사랑받은 기억이 별로 없는것도 지금의 효심 지향력으로 함께 정돈하여 나가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그저 부름에 응답하여 나가고

나머지는 주님이 해 주실 수 있도록 내어 맡기면 그만입니다.

 

그리하여 나역시 윤회(업)에 머물러 장차 자녀에게 측은지심이라는 정체성을 반복하기보다는 거저 주시는 주님의 강생과 풍요로운 구속에 감사드리면 좋은 결과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은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새로 생긴 신앙심이 모래성 쌓듯 무너집니까? 마음이 급하여 그렇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성찰을 더해보세요. 아주 조금씩도 좋습니다. 일기도 좋쿠요.

프로테스탄트교가 생긴 지난 500년동안 연옥교리를 배우지 못한 채 모태신앙을 가진 프로테스탄트교인들도 우리와 같이 원죄를 타고난 죄인이기에 함께 죄인의 마음으로 그것을 나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거의 막판엔 싸움과 언성이 높아짐으로 끝남은 아직 주님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싸울 때에도 주님과 함께 기도할 때 내가 따지던 그것처럼 따지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글을 여기서 접을테니 나머지는 형제께서 보충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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