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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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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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모 [kanghmo7] 쪽지 캡슐

2012-07-19 ㅣ No.71699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여든이 넘는 장수를 하시는 동안 그 많던 그분의동기간은 다 들 먼저 가 버리시고 남편도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 어른이라 곤 없었다. 장례 절차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의논할 데도 마땅치 않았다. 근래에는 종교 의식을 치르는 집이건 안 치르는 집이건 거 의 다 병원 영안실로 모시게 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병원에 입원했 다가도 임종이 가까우면 집으로 모시는 걸 도리로 여길 때였다. 무 종교인 집은 우선 장의사 먼저 불렀다. 우리도 그렇게 했고 장의사 가 다 알아서 해 주긴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흥정을 해야 했다. 사실 흥정이랄 것도 없었다. 이 정도로 살면 관은 얼마짜리 정도는 해야 하고, 수의는 얼마짜리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으로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혼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그 부르는 값에 이의를 제기할 눈치만 보이면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는 식으로 우 리를 윽박질렀다. 그런 일은 누군가 대신해 줘야 하는데 경험이 없 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 우리가 직접 관여한 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만만한 봉으로 보였대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가 당하기만 하는 걸 보다 못한 남편의 친구나 친척들이 중간에 끼 어들어 장의사의 횡포를 완화시켜 보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자 식의 마지막 효도를 왜 막느냐면서 상주인 우리 내외하고만 흥정을 하려고 했다. 비록 오랫동안 노망을 부리시긴 했어도 돌아가시자마 자 황폐했던 표정이 말끔히 가시고 아기처럼 순한 표정을 회복한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수의도 그분이 평소에 아끼시던 고운 비 단 치마저고리를 입혀 드리고 싶었다. 그런 나의 제안은 장의사 사 람들에 의해 본데없는 불효막심한 며느리로 그 자리에거 각하를 당 했다. 이 정도로 사는 집이면 좋은 안동포로 갖은 수의를 해 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노환으로 오래 고생 하시는 동안 수의 정도도 해 놓지 않은 나를 나무라는 투였다. 나는 '갖은 수의' 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하 도록 했다. 예전에 하던 식의 구색을 고루 갖춘 수의를 그렇게 말한 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의를 다 입혀 드리고 나서 유해를 여러 마디로 묶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묶으면서 그 마디마디마다 상주가 돈을 찔러 넣게 했다. 그건 고인이 저승길에 노잣돈으로 쓸 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넉넉하게 넣어 드려야 편안하게 가실 수 있 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입엔 동전을 물려 드리라고 했다. 그 또한 시키는 대로 했다. 염습을 끝낸 장의사는 마디마디에 찔러 넣 은 두툼한 지폐는 날렵하게 꺼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동전만 남겨 놓았다. 저승길에 노잣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산은 국도와 인접한 완만한 둔덕이어서 승용차나 영구차나 조금도 헐떡 거리지 않고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영구차는 몇 바퀴 안 구르고 멈춰 서서는 길에다 돈을 깔아야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신 부 집에 함 들어올 때 신랑 친구들이 경사에 흥을 돋우려고 재미삼 아 하는 짓을 영구차 기사가 하니까 상제가 나서서 뭐라 할 수도 없 고, 그저 일을 조용히 끝내고 싶은 일념 하나로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이렇게 치르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분은 종교도 없었고 학교도 안 다녔지만 인간을 아끼 고 생명을 존중하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신 분이었다. 만일 장례란 누구나 다 그렇게 치르는 거라면 구태여 죄책감을 느 낄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전에 가 본 문상 중에서 나도 죽으 면 저런 대접을 받고 싶다고 생각이 들 만큼 인상 깊은 장례식은 거 의가 천주교 의식의 영결 미사였다. 영결 미사는 고인이 부자든 가 난하든 명사든 보통 사람이든 관계없이 고인이 이 세상을 살아 냈 다는 데 대한 극진한 대접을 한다. 본 적은 없지만 사형수의 죽음이 라 해도 천주교에서는 이런 존엄한 대접을 해 줄 것 같다. 고인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절망보다는 큰 평화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 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하는 장례 미사를 보고 나면 인간이란 슬픔 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정화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슬픔이 있 는 기쁨이랄까. 그건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남기고 가는 선물일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새 생명을 맞는 의식을 종교 의식처럼 정성을 다해 경건하게 치르던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도 천성 적으로 생명의 존엄함을 알고 계셨던 분이다. 자식과 손자들을 받 들어 모시듯이 키운 분이라면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그 애들로부터 그에 합당한 감사와 공경과 애도를 받으셔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해 드렸다. 부모가 아닌 남한테도 우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게 도리거늘 나는 내가 시어머 님에게 해 드린 것 같은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아서 가톨릭 신자가 되 었다. 이렇게 불순하고 이기적인 며느리지만 그분이라면 저승에서 도 괜찮다, 괜찮아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그 리스도를 모르고 돌아가셨다고 지옥에 가셨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은 한 번도 없다. 만일 천주교 교리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나는 천주 교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세례 받을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 다고 해서 단지 장례 미사의 아름다움에 감동했기 때문만이었다고 는 말 못하겠다. 상식으로 또는 교양으로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그 냥 좋아했었다. 납득할 수 없는 몇 군데를 건너뛰고 나면 조금도 낯 설지 않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처럼 친근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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