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관 일기98/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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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8-05 ㅣ No.4290

         사제관 일기 98  

 

금요일마다 밤을 새워 성체조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젯밤도 몇 분이 늦도록 까지 조배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시각, 한 잔 하자는 전화를 받고 바깥 나들이에 신이 나 있었습니다.

벗었던 옷을 껴입고 신나게 내려가다,

조배를 준비중인 사람들과 그만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

밤 깊은 시각에 마실을 나가는 모습이 들켜버리자,

도저히 뒤가 켕겨 스스로 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멋쩍고 송구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빠져 나왔습니다.   

성전을 뒤로하며 나오는 길에는 왜 그리 뒤통수가 근질거리던지.......

........

오늘 아침,

늦게야 눈 비비며 일어나는 저더러 어머니께서는 살짝 귀뜸을 주십니다.

조배하시던 분들, 어젯밤도 저를 위해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말씀.....

저를 위한 묵주기도를 일주일 동안 수천 단이나 봉헌하신다는 말씀....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마음 착한 신자들은 主님을 모시고 한 밤을 새우는데,   

이 몹쓸 사제는 酒님을 모시며 술집에서 밤을 새웁니다.

신자들은 세속 안에서도 신앙을 빛내고 있는데,

이 신부는 신앙 안에서마저 세속을 살고 있습니다.   

 

신자의 영성이 사제의 영성을 앞선다는 건 이미 알았지만,

이렇게 까지 비교될 줄이야 차마 몰랐습니다.

신자들은 저를 더 많이 앞질러 있는데,

제 신심은 영성이라는 이름조차 부끄러울 만큼 바닥을 치고 있으니,

차마 부끄럽습니다......

도대체 이 철딱서니 없는 사제는 언제쯤이면 철이 들는지 한심합니다

........

지식의 나부랭이만 가르쳐 왔을 뿐, 정작은 가르칠 게 없는 이 영적 굶주림....

사제직분을 받드는 자가 영적으로 가르칠게 없다는 건 너무 비참한 일입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자가 가르치고, 가르쳐야 할 이가 배우고 있으니,

뒤바뀐 모순을 사는 이 참람(僭濫)함을 용서 청합니다.    

.........

이제야 늘 배고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영혼의 허기가 잦고, 영양이 부실한 이유도 알겠습니다.

나태와 쾌락만을 살찌워 왔을 뿐, 영혼의 밥은 굶고 살았습니다.

육신의 배는 불리면서, 영혼은 항시 배고픔에 허덕여 왔으니,

그래서 늘 목말랐고, 배고팠던 것입니다.

 

이제서 제 주제를 찾고, 제 분을 바로 봅니다.

결코 영성을 앞세울 자격이 없는 초심자에 불과함을...

신앙의 프로가 되기에는 가야할 길이 너무 먼 신앙의 초보임을...

하여, 먼저 남을 가르치려 드는 오만부터 없애야겠습니다.

그리고, 배우려는 자세로 진지하게 한 걸음씩 따라가겠습니다.

......

어느새 당신들은 따라잡지 못할 먼 거리에 이르렀거늘,

저만이 뒤쳐진 걸음으로 서있는 영성의 노정......

가르칠 건 없고, 배워야 할 건 많기만 한데,

왜 자꾸 한숨부터 나오는지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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