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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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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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1-07-23 ㅣ No.148520

카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하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청년이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근처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날 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설교 제목을 보고는 마음이 찔려서 말했습니다. ',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 그러자 다른 청년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 번 결심했으면 가야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 결국 한 청년은 교회로 가고 다른 청년은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30년 후, 그 때 교회로 갔던 청년은 미국의 22(1885-1889), 24(1893-1897) 대통령이 된 그로버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입니다.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자 각 신문들은 앞 다투어 발표했습니다. 이 신문은 시골 구석 구석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미국 교도소에 조그마한 감방에도 전해 졌습니다. 교도소의 초라한 감방 2층 끝 방에는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이 있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간수가 이 죄수에게 신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이 신문을 받아든 사형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며 후회했습니다. ‘그때에 올바른 선택을 했더라면그 사형수는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친구 '조지'였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린 기간은 대략 7년쯤 됩니다. 1491년부터 1498년까지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그건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상상에 의해 그려야했기 때문인데, 다빈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대신할만한 아름답고 선한 청년입니다. 다빈치는 자신이 상상하는 예수님의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6개월이란 시간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의 얼굴까지 그려 넣은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의 사악함을 표현할 모델을 구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한 사형수를 만나고 다빈치는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유다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꼈고 그 이후 그의 작업실에서 몇 달에 걸친 작업 끝에 유다의 모습은 완성되었습니다. 유다의 모습이 완성된 후 다빈치는 이제 그만 감옥으로 데려가라고 말하는데 연행되던 그가 갑자기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했습니다.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난 당신 같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소!’ 그러자 죄인이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6년 전 예수의 모델이었습니다.

 

저는 두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밀과 가라지는 분명 구분됩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밀과 가라지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 앞에서 멈칫했던 두 젊은이에게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어쩌면 당시에 가라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설교의 제목에 마음을 바꾸었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밀이 되었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설교의 제목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박장으로 갔고 여전히 가라지로 살았습니다.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대통령이 된 친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한 사람에게서도 보았습니다. 6년 전에는 누가 보아도 예수님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그 젊은이를 모델로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젊은이가 6년 후에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밀은 가라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야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바로 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로 가라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가라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바오로가 이제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밀의 모습입니다. 신앙 안에서 밀과 가라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제1독서는 명확하게 전해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젊은이도, 아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신앙의 거울로 한번 비쳐 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영적인 모습은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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