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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된 가곡] 봉선화 - 소프라노,김천애 -김형준시,홍난파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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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된 가곡 봉선화
가곡 〈봉선화〉를 작사한 김형준은 홍난파와 이웃에 살았는데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김형준이 살던 집 울안에는 봉선화 꽃이 가득했는데 봉선화를 보면 그는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는데 뒤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임으로써 가곡 〈봉선화〉가 탄생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또 그로부터 2017년 ...즉100 여년전 노래를 우린 듣고 부르고 있는것이다' 그는 1930년 후반 일본의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42년 봄 동경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신인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선발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보내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섰다.
예정된 노래를 부르자 앙코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에 답해서 그는 가곡 〈봉선화〉를 부른 것이다. 청중석의 교포들은 너무도 감격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난 후 분장실로 달려간 교포들은 그를 붙들고 울어 흰 치마저고리가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그후 귀국한 김천애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소복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 노래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유한 것이다.
즉 비록 겨울이 닥쳐와서 모진 눈바람에 형체마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혼백만은 결코 죽지 않고 길이 남아서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폐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있어 이 노래가 단순히 애수어린 가곡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노래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선화 를 부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