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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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마라나타! ♬~ 성탄 밤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풍동성당 레오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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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남 [agnes536] 쪽지 캡슐

2022-12-26 ㅣ No.101855

 



풍동성당 교우들에게 드리는 편지 162

22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2005년 12월에 저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림과 성탄 시기를 보냈습니다. 도시 전체가 성탄 축제를 기뻐하고 즐기는, 이국적이고도 황홀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첫 성탄절을 지내던 저의 마음은 무겁고 어둡고 삭막하기만 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던 문제는 성탄 연휴가 끝난 후에 곧바로 시작될 중간 고사였습니다.

 

2005년 1월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와서 초등학생처럼 ‘선생님 안녕! 친구들 안녕! 어떻게 지내니? 나는 완전 좋아!’ 이런 기초 인사말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저는 대학교에서 이탈리아어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어지럽고 어이가 없어서 지도 신부님을 찾아가 더듬더듬 말도 안 되는 이탈리아어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제 말이 교수님의 귀에는 아마 이렇게 들렸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안녕? 아니 안녕하세요? 말을 나는, 아니 저는 말씀을, 아니 말을 매우 못 해. 우리 말, 아니 너네 말, 아니 선생님네 말, 그러니까 이탈리아어, 나 1년, 너네 말 1년 배워, 아니 배웠어. 그리고, 아니 그래서, 아니 그런데, 지금, 너네 말 때문에, 아니 너네 말 가지고, 아니, 아무튼, 내가 그리스어, 알지? 그리스어 가르치고 있어, 아니 배우고 있어! 말이 되니? 내 말 알아들어?”

그랬더니 교수 신부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제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천천히 그리고 짧게 해결책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그렇다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봐. 그럼 도움이 될거야. 알았지? 잘 가.”

 

평소에는 신부님의 말씀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날은 놀랍게도 잠을 줄이라는 말씀이 모국어처럼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매일 하루에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으면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고, 그래서 80kg이 훌쩍 넘었던 몸무게는 70kg까지 빠졌고, 그와 함께 저의 머리카락들도 함께 빠졌습니다. 신부인 내가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낯선 타지에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매일 잠깐씩이라도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는데, 밤거리를 걷다보면 종종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던 동네 철부지들이 단체로 몽킹, 킹콩, 고릴라라고 놀려댔고 때로는 손가락 욕과 함께 술병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공부는 힘들고 생활은 비참하고 환경은 끔찍해서 몸과 정신은 조금씩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 기쁜 일, 반가운 일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병들고 상처받고 화가 나서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잿빛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해야 할 12월의 성탄 축제가 그렇게 답답하고 억울하고 암울하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12월의 어느 늦은 저녁 시간,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던 저는, 우연히, 기숙사 근처에 있던 작고 오래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닙니다. 암울한 마음과 조급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었는데 아마도 그런 마음들이 저를 자연스럽게 성당으로 이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낡고 초라한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제대 앞에서 허리가 굽은 연로하신 할아버지 신부님과 그 신부님보다도 연세가 훨씬 더 많아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성탄 구유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세상에서 가장 볼품 없고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성탄 구유를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신부님과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봉사자들이 꾸미고 있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 신부님과 할머니 봉사자들은 빛 바랜 낡은 종이 상자에서 아기 예수님, 성 요셉, 성 마리아, 천사들, 목동들을 꺼내서 성탄 구유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상은 말할 것도 없고 아기 예수님상조차 몇 십년 동안 한 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더럽고 촌스럽고 볼품없는 값싼 성상들이었습니다.

 

낡고 초라한 성탄 구유, 더럽고 볼품 없는 아기 예수님, 그 앞에서 힘겹게 구유 세트를 나르던 허리 굽은 신부님,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상을 들어 올리던 봉사자들의 주름지고 때묻은 손, 그런 가운데서도 끊이지 않던 뜻 모를 웃음 소리…

그날 저녁, 그 작은 성당 구석진 자리에서,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구원은 나이 들어 거동조차 힘겨운, 허리 굽은 할아버지 신부님과 할머니 봉사자들의 주름지고 때묻은 손에서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구원은 성탄 구유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럽고 민망한, 초라하고 볼품 없는 성탄 구유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물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구원은 1년 내내 허름한 창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가 깨끗하게 닦아주고 꾸며줄 사람조차 없어 낡고 더러운 상태로 그대로 구유에 누워 있던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지칠대로 지친 내가 조만간 안식을 얻게 될 것이란 희망찬 약속도 아니었고, 이제 곧 이 고통스런 시간이 끝날테니 조금만 참으라며 건네는 다정한 위로의 말도 아니었으며, 상처받아 엉엉 울고 있던 내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도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볼품없고 능력 없고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내 곁에서 꿋꿋하게, 묵묵히 서 계셨던 하느님이었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너무 초라하고 메말라서 차마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던, 늙고 병든, 허리 굽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저에게 구원은 감히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스런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러나 해야 할 일들을 남들에게 미루지 않고 주름지고 더러워진 손으로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던 하느님이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은 나처럼 가난하고 나처럼 상처받고 나처럼 병들어서 전혀 하느님 답지 않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구원은 결코 나를 부유하고 건강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가난하신 하느님으로 인해 가난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처입은 하느님으로 인해 이 깊은 상처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하느님으로 인해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질병이 나를 절망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구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는 가난하지만 부유하고 상처 투성이지만 당당하고 병들었지만 열정적으로 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이 밤, 풍요로운 하느님이 가난한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이 상처 투성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피조물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밤, 하느님은 가난하고 상처받고 병든 하느님이 되어서 초라한 마굿간, 더러운 구유에 발가벗은 채로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나의 구원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이제 하느님이 될 차례입니다. 여전히 나는 가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상처투성이지만, 여전히 나는 병들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이상 그것들을 신경쓰지 않으신다면 나 또한 그것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되신 하느님으로 인해 이젠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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