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7일 (금)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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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신부님_허무의 병, 무지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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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9-26 ㅣ No.176271

 

“약(藥)은 사랑의 하느님뿐이다!”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듯 시(詩)도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참 맘에 드는 시가 찾아왔을 때 기쁨은 참으로 오래갑니다. 얼마전 “꽃”이라는 시가 찾아 왔고 그때도 나눴지만 곱게 피어난 맨드라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인에게 재차 시화(詩畫)를 부탁하여 어제 저녁 무렵, 세상사에 지쳐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의 나눔도 중요하기에 저녁 묵상시간, 휴식시간에 나눴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하루하루 꽃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꽃같이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8월 중순에 찾아온 시인데 지금도 기쁨과 향기로 남아있는 시입니다. 더불어 꽃과 관련된 잊지 못하는, 몇 번이나 인용한 시도 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가난한 자매가 꽃같은 미소로 꽃 한송이를 들고 왔기에 즉시 써드린 답시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정말 꽃같은 예쁜 영혼을 만나면 “꽃보다 예쁘다!” 감탄하곤 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영혼, 꽃같은 영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성무일도 첫째 시편 후렴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영혼의 병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 영혼의 병, 무지의 병, 허무의 병에 약(藥)은 단하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임을 고백하는 위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꽃다운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려 25년전 저를 찾아와 큰 위로를 줬던 “민들레꽃” 시도 생각납니다. 순간 창밖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이 하늘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지금까지 내용들이 오늘 제1독서 코헬렛과 짧은 루카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코헬렛을 성경에 넣느냐 역사상 큰 논난이 있었으나 성경에 속함으로 얼마나 영적사고가 풍부해졌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일부 생략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체험적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작자의 허무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중세기의 대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 공감합니다. 

 

생명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치유될 허무의 병, 무지의 병이요,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시달려 고생하기 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친교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두터이 하자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못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지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이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가 됩니다.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닐에 힘을 실어 주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무지와 허무의 블랙홀, 심연에서, 늪에서 벗어날자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찬미의 사람들은 무지와 허무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충만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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