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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의 주님 부르심에 순명의 삶을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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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고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라며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태오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당신의 의도적인 판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께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닌, 일단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는 부르셨기에. 어쩌면 이 부르심은 예수님의 지상 순례의 목적인 의인이 아닌 죄인의 회개와 일치한다. 예수님의 이 부름에 마태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수도. 지금껏 그에게 그렇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가온 이가 없었기에.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주위의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도 물론 한 참에 불렀다. 사실 세리인 그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이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제법 부유하게 살았을 게다.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하느님께 죄송스럽고 동족에게는 미안함이 쾌나 있었으리라. 의인보다 죄인 쪽의 삶이었기에. 다시 말해 로마에 빌어 붙어서 가난한 이의 세금을 거두어, 일부를 로마에 바치는 데 썼기에. 아무튼 그의 재산은 넉넉했지만 언제나 주위에서 버림받은 외톨이였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것이 무엇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의 사명이 의인이 아닌 죄인을 찾는 자비를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는 과연 무얼까? 그것은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가 있는 원동력이 되는 좋은 행동이란다. 그러나 타고난 자비심은 없다. 자비는 노력과 희생의 결과이다. 참을 줄 알아야만 자비스럽다나. 비웃음을 극복하지 않고는 참된 자비가 없다. 조금 더 가졌다고, 하나 더 안다고 거들먹이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사람을 우습게 군다. 이를 어찌 자비로운 이라 할까? 바리사이들은 세리들을 가소롭게 여겼다. 하물며 그들은 예수님마저 역시나 하며 하찮게 여겼으리라. 사실 하찮은 이는 이 세상에 없다. 내가 그렇게 여기면 그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할 테니까.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한다.’ 라는 말도 있지만, 때로는 아니 앉음만도 못할 때도 있더라. 들썩 앉았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공동체도 멍들게도 한다. 죄인이었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상납하며 부를 축적하는 공공연한 죄인이요 파렴치한인데도. 아닌 죄인들도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 식탁에 앉는다. 이 모습을 바리사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게다. 흔히들 하느님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하느님께서는 왜 못된 이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지를, 자신들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나. 아무튼 부족한 이를 챙기는 이가 정녕 자비로운 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챙겨주는 이가 진정한 자비로운 자다. 이 주님 자비는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하게 다가온다. 대한 진정한 우리 응답은 참으로 참 행복으로 이끌리라. 이런 부름이 여러 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걸 수차 놓치곤 할게다. 아무튼 그 부름이 지나간 것을 알 때에 우리 마음은 얼마나 허망할까? 그러기에 일상의 삶에서 그분께서 부르시려고 ‘나를 따르라!’ 라는 그 부르심에, 다가가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마태 9,9-13) https://blog.naver.com/bigllightqa/22392101320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