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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 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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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어 시간에 ‘운문과 산문’을 배웠습니다. 운문은 시와 시조처럼 리듬과 가락이 있는 언어입니다. 반면 산문은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형식입니다. 운문은 짧지만, 때로는 산문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저에게도 애송시 몇 편이 있습니다. 나태주의 「시(詩)」, 이정하의 「험난함이 거름이 되어」, 윤동주의 「십자가」, 그리고 지하철 안전문에서 읽었던 작자 미상의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라는 시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그래야 구름도 보고,/ 그래야 꽃도 보고, 그래야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이 시는 우리에게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늦음’이라는 현실을 원망하지 말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은 단지 목적지에 이르는 경주가 아니라, 그 여정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눈은 창문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관점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줍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입니다. 마치 엄마의 태중에서 태어나는 아이처럼, 세상으로 나오는 고통은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가족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위령 감사송도 이 관점을 이어줍니다. “주님의 종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며, 이 지상에서의 거처가 무너질 때는 하늘에 영원한 처소를 마련해 주시나이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부활의 희망을 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운문의 형태로 기록된 시편은 예수님의 기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편),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시편 31편)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메시아적 정체성을 말씀하시며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시편 118편), “주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라고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시편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드러내는 깊은 기도였습니다. 저 역시 사제품을 받을 때 시편 126장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기쁨으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과 수고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구체화합니다.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순교의 피가 되었고, 교회는 그 결실로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제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세상의 성공과 인정은 덧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곧 하느님과 깊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가 자녀를 위로하듯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쁨의 추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처럼, “씨를 지고 울며 나가던 이,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