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 |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 루카 11,42-46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조항을 중요한 율법 규정으로 여겨 시행하게 된 계기에 대해 모세가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너희는 세 해마다 끝에,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8-29).”
이처럼 십일조를 지키는 목적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 근본 목적은 잊은 채, 그 규정을 열심히 지키는 모습을 통해 자기 신심을 과시하려고만 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것이지요. 엄밀히 따지면 박하와 운향 같은 향신료와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바쳐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들을 직접 재배해서 먹지 않고 들에서 자라는 것들을 채취해서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굳이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자기 신심을 과시하는 한편, 형편이 어려워 십일조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려 들었기에, 그렇게 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십일조의 근본 목적을 정면으로 거슬렀기에 강한 질책을 받은 겁니다.
그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비단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지요. 여건이 풍족해서 자선을 많이 베풀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풍족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 되는데, 굳이 자기만큼 여유가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일 때 입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으면 자신 뿐 아니라 기도가 필요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면 되는데, 굳이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십일조를 열심히 바쳐도 하느님께서 그 봉헌을 기쁘게 받아주시지 않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참된 십일조는 마지못해서 혹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로서 소득의 10분의 1을 칼같이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봉헌했다는 사실로 자신이 대단히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인 양 스스로를 높이는 게 아니라, 삶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차별없이 은총을 베푸시는 공평함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죄인을 ‘아픈 손가락’으로 여겨 더 큰 자비로 감싸 안으시는 관대함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에 마음이 뜨끔하여 그분께 발끈하는 율법학자들처럼 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을 강하게 꾸짖으시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분개하여 그분께 이렇게 따지지요.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에 대한 모욕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발끈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기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며 ‘회개’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너희는 불행하다’라고 꾸짖으신 것은 실제로 그렇게 되라는 ‘저주’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이고, 무엇이 나를 불행케 하는지를 제대로 확인하여 그것에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서 그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기분만 나쁘다면 그만큼 내 위선과 교만이 ‘중증’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