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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일 (일)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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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수원 교구청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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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01 ㅣ No.185977

김건태 신부님_구름 같은 증인들에 둘러싸인 교회

 

[말씀]

■ 1독서(묵시 7,2-4.9-14)

초대교회 신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잔혹한 박해로 말미암아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그렇게 기다려온 주님의 날’, 승리를 소리 높여야 할 그날은 정녕 다가오지 않을 것인가사도이며 복음저자인 요한은 묵시록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와있다는 것입니다다만 우리가 그날을 온전히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신앙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을 보는 사람들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해서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영원한 승리가 보장될 것입니다.

■ 2독서(1요한 3,1-3)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에 우리 마음의 눈을 열 때 우리의 모습은 바뀔 것입니다곧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이는 언젠가 분명히 드러날 현실이다주님의 승리는 이처럼 그분이 택하신 자녀들 안에서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 복음(마태 5,1-12)

단순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중을 향하여 예수님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설파하십니다가난한 사람들슬퍼하는 사람들온유한 사람들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자비로운 사람들마음이 깨끗한 사람들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여기서 그 기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하늘나라가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새김]

좌절과 체념의 시간 속에서 몸부림칠 때또는 시련으로 말미암은 고독이 온몸을 짓누를 때우리는 힘과 용기를 찾기 위해서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그 사람이 사라져 이 세상에 없을 때도그에 대한 추억은 변함없이 그 기능을 발휘합니다소중한 그의 현존은 죽음을 넘어서도 여전히 자리하며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혀주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는 우리를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셨던 분들을 너무나 자주 잊습니다그들에 대한 기억우리를 그들과 맺어주는 사랑의 고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힘과 기쁨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잊혀 있는 이분들을 기억하면서모든 세대를 넘어서 이어져 온 무한한 사랑의 고리를 다시 의식하도록 초대받습니다그럼으로써 우리는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나가며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1-2) 용기를 얻고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증인들이신 성인들을 기억하고그분들의 삶을 본받아언젠가는 그분들과 함께 영원한 천상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다짐과 희망으로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다져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5,1-12: 참 행복(산상설교) 

 
1.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 우리도 성인이 되라는 초대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이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교회의 승리자들을 찬미하는 날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날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인들을 주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주시기 위함이다.”(Sermo 88, PL 38, 540) 아무리 많은 성인을 공경하더라도 내가 성인의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분들과는 아무런 친교가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 산 위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행복 선언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 제자들에게 참된 행복을 가르치셨다고 전하고 있다. 산으로 오르셨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적 이동이 아니라, 제자들을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고자 하신 상징적 행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은 산 위에서 가르치셨다. 이는 율법이 시나이 산에서 주어졌던 것처럼, 새로운 율법 곧 은총의 복음을 산 위에서 선포하시기 위함이다.”(In Matthaeum Homiliae, PG 57, 58) 따라서 참 행복은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율법, 곧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선언이다. 
 
3. 참 행복의 역설과 그 의미
예수님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행처럼 보이는 상황을 오히려 참 행복이라 선언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주목받거나 존경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참 행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거짓 행복을 뒤엎으시고, 진정한 행복이란 세상의 부와 권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위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치신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V, 62) 
 
4. 성인의 삶: 참 행복의 완성
모든 성인 대축일에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바로 이 참 행복의 길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나 고통받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광으로 드러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원은, 저마다의 삶의 처지에서 완덕으로 부름을 받아 있다. 모든 신자는 성덕을 지향해야 하며, 그 길에서 사랑이 완덕의 유대이다.”(교회 40) 즉,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소명이다. 
 
5. 오늘의 적용: 성인이 되려는 결단
오늘 대축일은 성인들을 공경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성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날이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우리를 깨우친다: “당신이 성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성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그 길을 걷기를.”(Sermo 335, 1)
우리 각자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참 행복의 길을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외면하는 가난, 온유, 자비, 박해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6. 결론
오늘 우리가 기리는 모든 성인은, 산상설교의 참 행복을 온전히 실천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낸 이들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하라”(마태 5,48)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그 길 끝에 하늘나라의 영광에 들어갔다.

우리도 이 미사 안에서 결심하자. 단순히 성인들을 흠모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참 행복의 길을 살아내어 우리 자신이 성인으로 나아가도록, 그리고 언젠가 하늘에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자리에 참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마태오 5,1-12ㄴ 

 
행복도 '간절히' 원해야만 방법이 보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알든 모르든,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성인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인이 되는 길', 곧 '참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놀라운 약속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그 즉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보상의 약속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아주 근본적인 갈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 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오늘 강론의 제목처럼, 우리는 '행복하려는 만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어린 저에게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고 나면,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잠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매일의 죽음'(잠)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행복'을 향한 갈망이, 저를 이 사제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계속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행복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내가 더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구나. 온유해져야구나. 자비로워지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구나.' 물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처럼 '간절히' 행복을 원할까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그 갈망이 '간절'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을 막연하게 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빠집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할까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지금의 적당한 행복'에 만족해버립니다.
둘째,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끊임없이 '남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행복'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정한 '거짓 행복'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보십시오.
그의 '행복'은 '절대 반지', 즉 "My Precious"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미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오늘',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햇빛도 없는 동굴에서 생선을 날로 뜯어 먹고, '스미골'이라는 호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흉측한 괴물로 퇴보합니다.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편집증, 불신, 증오, 고독으로 매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미래 목표'는 '세상을 통제하는 것',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너두'라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도 없는 거대한 궁전에 스스로를 유폐시킵니다.
그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는 '극도의 고독'과
'분노'를 가리켰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신화 속 '미다스 왕'은 '미래의 부'(황금)에 눈이 멀어, '오늘의 행복'(음식의 맛, 딸의 온기)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불행을 깨달았습니다. 
 
골룸이나 케인, 미다스 같은 이들이 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신들이 믿었던 '행복의 목표'(미래의 반지, 미래의 통제, 미래의 황금)를 너무나 철저히 맹신한 나머지, 자신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가 '절망'과 '고독'을 가리키고 있어도 애써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대신 "저놈 탓이야"라고 남을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래의 자녀 성공', '미래의 은퇴 자금'이라는 목표를 좇느라, '오늘' 내 영혼의 행복 게이지가 '불안'과 '공허'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까?"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골룸처럼 '미래의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에 집중합니다. 
 
이 '막연한 원함'이 '간절한 갈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이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내가 좇던 '미래의 행복'이 신기루였음을 깨닫는 '바닥 체험'(Rock Bottom)의 순간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꿀잠'이라는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이 '바닥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시민 케인'처럼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최고 작가의 '명예'를 얻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부자'였으며, 건강한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골룸이나 케인이 좇던 '미래의 목표'를 모두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5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절망'과 '공포'로 바닥을 쳤습니다.
그는 ‘고백록’(A Confess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장이었지만, 내 삶이 멈추었고 숨을 쉴 수 없음을 느꼈다.
... 나는 밧줄이 걸린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자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케인처럼 '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늘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의 원인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 모든 '미래의 목표'(명예, 부)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 '오늘의 행복 점검'이 왜 우리를 성인으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현대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 모임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미래의 완벽한 금주'가 아닙니다. 그런 '미래 목표'는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오늘'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오늘 하루(One day at a time) 술을 마시지 않고 평온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오늘의 행복'입니다. 
 
그들은 '오늘 마음이 불편한가?', '오늘 누군가를 미워했는가?', '오늘 정직하지 못했는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분노, 원망, 거짓말, 죄책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의 행복(평온)이 깨지고
다시 술을 찾게 됨을 뼈저린 '체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밤 꿀잠'을 자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늘' 용서를 청하고('자비로운 사람들'), '오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노력합니다. 
 
'미래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참행복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태5,1-12ㄴ)은 '참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 당하고 박해 당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11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죽음의 다리 저 너머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 모두의 영명축일'입니다. 
 
천상 교회 안에 계시는 모든 성인들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이미 다다르신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천상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신 성인들의 수는 신천지 이단이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이 아니라,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요한묵시록7,4.9 참조)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요한묵시록7,14ㄴ) 
 
우리도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갑시다!
성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참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분들, 몸과 마음이 끝까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분들이십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모든 성인들을 따라갑시다! 
 
"하늘의 모든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1열왕20,3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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