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일 (화)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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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깨어 있어라.”(마태 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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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30 ㅣ No.186585

* 오늘의 말씀(11/30) : 대림 제1주일

* 제1독서 : 이사 2, 1-5

* 제2독서 : 로마 13, 11-14ㄱ

* 복음 : 마태 24, 37-44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혹스런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타성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 젖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죄를 피한다할지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서 이를 행하고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하고, 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 지 집 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하느님을 기다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전례>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분명한 사실은 ‘주인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깨어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요, 오시는 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 군데에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곧 ‘정신차려있는 것’ 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을 향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의 깨어있음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비로소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셋째>의 의미인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 요청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빛 속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아멘.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 군데에 눈 돌리지도 말게 하시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시고,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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