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일 (화)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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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0일 수원 교구 묵상 글 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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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30 ㅣ No.186586

이병우 신부님_<대림 제1주일>(11.30)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2.44) 

 

기다림의 의미인 회개! 

 

오늘 복음(마태24,37-44)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은 '새해'입니다.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가해)에는 더 영과 육이 함께 건강하시고, 주님 뜻 안에서 그리고 성모님의 전구로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시기를 빕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이며, 기쁨과 희망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두 기쁨과 희망을 기다립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인 성탄'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인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오늘부터 12월16일까지의 전례는 '다시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12월17일부터 12월24일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준비'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올려질 수 있도록,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기쁘게 탄생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준비가 바로 '회개'입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사순시기와 같이 '회개와 속죄의 시기'이며, 사제는 그 의미를 상징하는 '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1.12)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새해를 맞아,

하느님 사랑 안에 더 깊이 머물고, 그래서 더 큰 은총을 받고, 그러기 위해서 '미사와 기도와 말씀과 사랑실천'에 더 충실합시다! 

 

(~ 2역대17,19) 

 

전삼용 신부님_ 마태오 24,37-44 

 

우리는 깨어있지 못한 핑계를 댈 수 없다   

 

 

영화 '아폴로 13호'를 보셨습니까?

달을 향해 가던 우주선의 산소통이 폭발하여, 우주비행사들은 차가운 우주 한복판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합니다.

그들이 살아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지식이나 경험, 혹은 "살고 싶다"는 의지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구에 있는 **'휴스턴 관제센터'**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관제센터가 "전원을 끄라"면 끄고, "켜라"면 켰습니다.

그들은 우주선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관제센터는 모든 데이터를 보고 생환 경로를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비행사가 "내 생각은 다른데요?

내 방식대로 살아볼래요."라며 지시를 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영원한 우주 미아가 되어 소멸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그곳에 보낸 이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만이 나중에 살아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것이 생존의 법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닥치기 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까요?

누구나 자기 뜻을 따라 사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관제센터(창조주)'의 지시에 귀를 닫은 것입니다.

오직 노아만이 하느님의 뜻(방주 건설)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지시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미 어둠이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분, 나를 다시 부르실 분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의무를 잊고 "나는 몰랐다, 죄 없다"며 핑계를 댑니다. 

 

임언기 신부님이 만난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암 말기로 임종을 앞둔 분이었는데, 30년 이상 냉담 중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주려고 십계명과 칠죄종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도와주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이 포기하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 죄 없어!" 

 

그는 정말 죄가 없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세상의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떳떳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주의 뜻(주일 미사, 기도, 사랑)을 30년이나 무시하고 산 것, 관제센터와의 교신을 끊고 제멋대로 산 것 자체가 가장 큰 죄임을 그는 몰랐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것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거룩해 보이는 성인들도 이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위대한 성서학자 성 예로니모는 꿈속에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당당했습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거짓말 마라!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 추종자다.

너는 성경보다 로마 문학을 더 사랑하지 않느냐!"

그는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따르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전율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수녀로 20년을 살았기에 구원은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환시를 통해 본 '자신이 갈 지옥의 자리' 앞에서 그녀는 경악했습니다.

봉쇄 구역에서 사람들과 잡담하며 세속적인 즐거움을 누렸던 그 미지근함이, 곧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만날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부끄러운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 주님께서 신학교로 부르시는 것을 느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쾌락이라는 '제 뜻'을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건방지게 "확실한 표징을 주시면 믿겠다"며 버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술기운에 성당에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고꾸라져 벌벌 떨며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내가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거룩한 분을 만난다면, 그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공포구나."

진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제 양심은 제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분 앞에서는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던 것입니다. 

 

제가 비로소 주님을 만날 용기를 낸 것은 신학교에 입학한 후였습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그분의 뜻에 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체를 영하는데 주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는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다~ 주었다." 

 

제가 제 고집을 꺾고 관제센터의 지시(부르심)를 따르려 했을 때, 비로소 다 주시는 주님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듣고 따름만이 그분을 만날 유일한 준비요, 깨어있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결코 '갑자기' 오시지 않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했을 때 홍수가 났듯이, 우리가 그분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여 준비되었을 때 오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거창한 영웅이 되고 싶었으나, 수녀원에 갇힌 처지를 핑계 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핀 하나를 줍더라도

사랑으로 줍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수녀에게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고, 짜증 나는 소리를 참아내며

'작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내 뜻을 꺾고 하느님의 뜻(사랑)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이 살기 위해 관제센터의 지시에 온 신경을 집중했듯이, 우리도 살기 위해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입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 지시를 따를 때, 우리는 죽음 너머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주님을 웃으며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1. 서론: 주님의 오심과 교회의 기다림

대림 시기는 오심의 신비(mysterium Adventus)를 기념하는 전례 시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오심”을 고백한다. 첫째, 역사 안으로의 오심(강생, incarnatio), 둘째, 은총 안에서 매일 우리에게 오심, 셋째, 영광중에 다시 오심(재림, parousia).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오셨고, 또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신다. 매일의 오심을 거부하는 자는 마지막 오심에 놀랄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95,14) 따라서 대림의 ‘깨어있음’은 단순히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매일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적극적 신앙의 자세를 뜻한다. 교리서(524항)는 대림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를 지내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기다림을 되새기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와 희망을 새롭게 한다.” 

 

2. 복음의 핵심 구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노아의 시대를 회상시키며, 불시의 심판과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하신다(마태 24,37-39).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 하느님의 징조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은 죄악에 빠져 살면서도 평화를 즐겼다. 그들은 멸망의 날이 오기 전까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영적 잠은 육신의 잠보다 더 위험하다.”(Homiliae in Matthaeum, 77,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라.”(로마 13,11) 촉구하신다. 이 “잠”은 단지 게으름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에 대한 무관심, 세속적 안일함, 영적 무감각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은 따라서 신앙의 실천적 태도이다.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식별하고 실천하는 능동적 준비”이다. 

 

3. 노아의 방주와 구원의 표징

노아의 방주는 성경 안에서 구원의 상징이다(창세 7,11-23). 오리게네스는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예형(typos Ecclesiae) 으로 해석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표지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처럼, 교회는 세상의 격랑 속에서 믿는 이들을 품는다. 방주 밖에는 구원이 없었다.”(Homiliae in Genesim, 2,4) 대림의 기다림은 곧 교회 안에서 구원을 준비하는 삶이다. 교리서(845항)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통하여 온다.” 

 

4.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이 구절은 단순히 선택의 무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본질이 드러남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날에는 인간의 마음에 숨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겉으로는 함께 있었으나, 마음은 함께하지 않았던 자들이 구별될 것이다.”(Sermo 93,3) 심판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는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교리서(678gkd)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종 심판은 인간의 행위와 마음의 비밀을 드러낼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응답한 사람은 생명으로 들어가고, 거부한 사람은 스스로를 정죄한다.” 

 

5. “깨어있어라.”: Vigilantia의 신학

예수의 명령 “깨어있어라.”(42절)는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영적 주의력을 의미한다. 교리서(2730항)는 이렇게 말한다. “깨어있음은 마음의 순수함을 지키는 행위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유혹을 분별하는 태도이다.” 교부들은 깨어있음의 의미를 “사랑의 긴장 상태”로 이해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잠들지 않는다. 깨어있는 마음이란 사랑으로 타오르는 마음이다.”(Sermo 254,3) 이 사랑의 긴장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향한 교회의 영혼 태도이다. 사목 헌장(39항)은 이 긴장을 종말론적 희망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세상 안에서 이미 그 하늘의 씨앗을 키운다. 대림의 기다림은 이 희망을 실천하는 교회의 사명이다.” 

 

6. 바오로 사도의 권고: “지금은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로마 13,11)

바오로는 대림의 신학을 요약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이미와 아직 아님’(already–not yet)의 신학이 바로 대림의 시간성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밤은 이미 물러갔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유는 우리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이다.”(Homiliae in Romanos, 23) 이 깨어남은 도덕적 결단이며, 성화(sanctificatio)의 길이다. 교리서(2849항)는 “깨어있음”을 유혹을 이기고 선을 실천하는 은총의 협력으로 본다. 

 

7. 결론: 매일 오시는 그리스도

대림의 기다림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매일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훈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안에서, 성사 안에서, 이웃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 안에서 매일 오신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로 마무리하자. “그대가 그리스도를 매일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마지막에 오실 때 그대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95,14) 

 

김건태 신부님_시작은 마침의 첫 단추

 

 

 

[말씀]

 

■ 제1독서(이사 2,1-5)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남 유다 왕국의 초라하고 자그마한 수도에 불과했다. 인근의 여러 나라가 끊임없는 위협을 가해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서 절망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이며 동시에 왕국의 귀족계급에 속했던 이사야는 새로운 앞날을 예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다시 돌아선다면, 성도(聖都)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씀을 선포한다.

 

■ 제2독서(로마 13,11-14ㄱ)

 

선교활동 초기에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리라 믿고 있었으나, 로마서를 집필할 시점에 이르러서는 종말은 앞으로 전개될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지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계획이, 사람의 마음이 정의를 바탕으로 성숙의 길을 걸어감에 따라 서서히 실현되어 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살아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사람에 의해 세상은 변화되고 완성, 곧 종말을 향해 달려 나가리라 가르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다.

 

■ 복음(마태 24,37-44)

 

당신 말씀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님은 묵시문학적인 화법으로 다가올 날을 예고하신다. 주님은 이날을 하느님 왕국의 결정적 도래를 맞이하기 위해 거쳐야 할 혼란의 한 과정으로 설명하신다. 우주의 현상을 빌어 설명되는 이 혼란은 사람의 마음이 성숙의 단계에 접어들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신앙인은 따라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며, 늘 깨어 준비해야 하는 사명 앞에 선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기 때문이다.

 

 

 

 

[새김]

 

새로운 신앙의 한 해가 열립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옴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기는 하나, 우리네 신앙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늘 죄송함과 부족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지나간 시간들을 새로운 시간들과 함께 정리할 수 있다는 기쁨과 용기가 우선 앞서기 때문입니다. 더욱 열심히 살아보겠노라는 다짐이, 시간의 흐름이 없다면 가능하기나 한 노릇이겠습니까? 좀 더 솔직한 마음으로 지나간 날들의 부족했던 점들을 인정하고 용서 청하며, 회개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새로운 신앙의 한 해가 열립니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주님 오심을 준비하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성스럽게 이 한 해를 엽니다. 주님 오심으로 옛 시대[舊約]가 마감되고 새 시대[新約]가 열릴 수 있었던 것처럼, 부족했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희망 가득한 시간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고마운 가르침대로,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또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좋으면 마침도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기, 마침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 나가야 하는 시기, 대림시기입니다!

 

 

 

깨어 기도하며 주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은해로운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깨어 기도하며 주님 맞이에 열성을 다하는 가운데, 세속의 한 해도 차분히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하는, 뜻깊은 시간들 이어나가시기 바랍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찾고 계십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7-44).”

 

 

 

1) ‘대림시기’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회개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다린다.’ 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안 계신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또 이 말 때문에 누구든지 무의식중에, 예수님을

 

지금 이곳에 안 계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믿음과 모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그리고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나라로 가신 일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

 

지금 이곳에, 즉 어디에서나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시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회개하는 시기입니다.

 

 

 

2)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 텐데, 몸이 떠나지 않았더라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떠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잠깐이라도 딴 생각을

 

하고 딴 마음을 품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습니다.

 

성인 성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8-19.24)”

 

세속 안에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에 속한

 

것들에게 오염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오염된 물속에 있으면 그 물에 젖을 수밖에 없고, 흙먼지가

 

많은 곳에서 지내면 흙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시기’는 그 오염물을 씻어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를 찾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대림시기’에 우리가 할 일입니다.

 

<물론 ‘대림시기’가 아닌 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3) 38절의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 일 자체가 ‘죄’는 아닌데, 그런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39절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여기서는 대홍수가 닥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처음부터 계속 회개하라고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으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4)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 “준비하고 있어라.” 라는

 

말씀을 합해서 단순하게 표현하면 “회개하여라.”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그날은 곧 온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은 틀림없이 곧 온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곧 오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어떤 응급 상황에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을 생각하면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단 몇 초 차이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목숨을 건지는 일이 흔히 생깁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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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1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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