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4일 (목)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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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수원 교구 묵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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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02 ㅣ No.186618

양승국 신부님_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김건태 신부님_보는 눈

 

오늘 복음 장면에 앞서 주님은 일흔두 제자를 선교의 길로 파견하셨으며, 그들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러니까 그들의 메시지가 사람들, 특별히 철부지와 같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이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주님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완성하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의 눈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우리가 보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뀌어나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건강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지가 될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짧지 않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변화의 순간들이 때로는 하나의 위기로 다가와 혼란스러워도 했고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이, 한편 곰곰이 생각하고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기회,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기회, 더욱 성실한 자세로 신앙생활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믿고,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을 향해, 특별히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그 차가운 베틀레헴 마굿간에서 떨고 계신 아기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내려가고자 힘씁니다. 정의를 외치고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거나 부당한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을 제대로 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생생한 교육의 장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고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짊어지고 나갈 수 있도록 고무하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보기 위해서 마음의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과거만을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지양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고 이르신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이고 행복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는 것을 보는 눈으로 행복한 하루, 매사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사랑 실천으로 드러내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성과를 들으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21절) 

 

하느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드러나신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20,7)이라고 표현했다. 곧 하느님은 인간의 교만한 눈에는 감추어지지만,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는 드러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셨다.”는 말씀을 주석하며, “철부지들이란 단순히 배우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순수함이 계시의 문을 연다.”(Homilia 38,3) 말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안다.”(22절 참조)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친밀한 일치이다. 그리고 그 친교 안에 성령께서 사랑의 끈으로 계신다.”(De Trinitate, I,4,7)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만 열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23-24절 참조) 선언하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 계약의 예언자들은 오실 분을 희망 속에서만 보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다.”( 63,2)라고 강조했다. 교회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다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계시 헌장도 “예언자들과 율법은 모두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15항)라고 가르친다. 

 

대림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째, 겸손과 단순함의 태도를 회복하라는 초대이다. 하느님은 학문적 논리보다 겸손한 마음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듯, “하느님을 알기 위한 가장 큰 지혜는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6) 둘째, 은총의 행복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고 듣는 은총을 받았다. 이는 과거 제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의 눈은 복되고, 우리의 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받은 은총을 삶의 제물로 드리는 일이다(로마 12,1). 


전삼용 신부님_루카 10,21-24 

 

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10,21ㄱ) 

 

'우리도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0,21-24)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님에게 드러났다는 '계시(드러남)'와 제자들에게 하신 '행복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라는 일흔두 제자의 보고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10,21)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시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능통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부지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곧 율법이요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철부지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삶으로 재육화시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칩시다! 

 

(~ 2역대23,21)


송영진 신부님_<성탄절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기쁜 날’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철부지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낮은’ 위치에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찬미’가 연상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철부지들’과 천사들이 말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사실상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씀은,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철부지들만’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만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들,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는 자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자랑하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과 영혼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그자들에게는 감추셨다는 말씀은,


그자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원래, 구원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원하지 않고, 또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날인데도,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남의 잔치’일 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라는


말씀에서 ‘마리아의 노래’가 연상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마리아의 노래’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찬양하는 찬미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도 불의한 권력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살면,


또 부유한 자들도 혼자만의 부유함을 버리고


진심으로 자선을 실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인간 구원’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니,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요한 8,42).”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이나 다른 진리나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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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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