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03.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 임신 10–28주 / 대림 3주)
존재의 권한을 묻다.
#되어감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생명은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임신 10주에서 28주 사이, 아기의 얼굴이 형성되는 시간을 생각해 본다. 눈꺼풀이 생기고, 입술이 만들어지며, 귀가 제 위치를 찾아간다.
이 작은 생명에게 누가 "권한"을 주었나? 누가 존재할 자격을 부여했나?
태아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다만 자란다. 심장이 뛰고, 손가락이 움직이고, 얼굴이 형성된다. 그 어떤 권위자의 허락도 없이, 그저 생명의 힘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었소?"
그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자는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예수님의 침묵.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되물으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궁지에 몰렸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믿지 않은 자신들이 문제가 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들고일어날 것이었다. 그들은 "모르겠소" 하고 대답했고, 예수님도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누군가를 몰아붙이기 위한 전략도 아니다. 오히려 권력의 언어로는 다 닿을 수 없는 자리, 존재의 깊이 앞에서 멈추는 침묵처럼 느껴진다.
진정한 권위는 사람들에게 허락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음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 그 자체가 응답이다.
현대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응답이다. 묻는 것은 권력이지만, 존재하는 것은 은총이다.
빚어지고 있는 태아의 얼굴은 우리에게 묻는다. "내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나를 환대할 것인가?"
임신한 여성 역시 이 질문 앞에 홀로 서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가볍지 않다. 대개는 책임감에서 나오고,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섞여 있다.
생명은 결코 단순한 이상이나 구호가 아니며, 여성의 삶 또한 가볍게 다뤄질 수 없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누군가를 재단하는 말보다 먼저 머무는 침묵이 필요하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피조물은 존재함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한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완성되지 않아도, ㅡ저 존재함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생명을 판단하는가?”
이 질문은 누군가를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자리와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 문제가 권한의 언어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이것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책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태아는 우리가 평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다.
칼 라너는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얼굴을 갖춘다고 했다. 특히 가장 연약하고 방어할 수 없는 존재, 태아의 얼굴 속에서.
대림기간 우리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연습을 한다. 자격을 묻기 전에 존재를 환대하는 용기, 권한을 주장하기 전에 책임을 함께 짊어지려는 겸손.
나는 오늘 이 질문 앞에 서 본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가.
자격인가, 성취인가, 아니면 여전히 주어지고 있는 은총인가.
내 안에 형성되고 있는 생명—
몸 안의 생명이든,
마음과 관계 안의 생명이든—
그 생명에게 나는 어떤 공간을 내어주고 있는가.
작은 이의 기도
하느님,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이 시간,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모든 생명을
두려움보다 경외로 바라보게 하소서.
자격을 묻기 전에
함께 머무는 용기를 주시고,
권한을 주장하기 전에
책임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태중의 아기와 그를 품은 어머니,
그 연약한 얼굴들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조용히 열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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