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수)
(자) 12월 17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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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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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15 ㅣ No.186856

김건태 신부님_예수님의 권위

유다교의 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사회의 지도자들인 원로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이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가르치는 문제로 이의를 제기한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앞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보여주신 충격적인 행적까지(마태 21,12-13)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자격 문제, 권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앞에서 군중은 모두 놀라워하며 권위 있는 말씀 또는 행적이라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의 눈에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분위기, 마냥 부정하고 싶은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지도자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배경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마음속에 간직해온 그 하느님과,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하느님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처럼 숭배해온 그 제도와 전통이 일러준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시는 하느님이 상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하느님은 하나의 우상일 뿐입니다. 사실 이러한 아집과 판단이, 끝내 예수님을 하느님 모독죄로 유다교 법정에 서시게 했던 것입니다(마태 26,65). 하느님께서 하느님 모독죄로 종교 법정에 서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사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들이 향유해 온 기득권 문제입니다! 말씀으로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현존 앞에 그들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행동하지도 않고, 아는 대로 실천하지도 않고, 믿는 대로 실천에 옮길 생각이 전혀 없으니, 권위와는 요원한 삶을 살았던 그들입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반문,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하는 질문에 “모르겠소”하고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알면서도 말입니다. 모든 군중이 ‘하늘’이라고 외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대림시기는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에 옮기실 주님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言行一致), 아는 대로 실천하고(知行一致), 믿는 대로 실행하는(信行一致) 권위 있는 삶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권위를 가슴에 담고 조금씩 훈련을 쌓아나가는, 뜻깊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에 머물 것인지 늘 물음 앞에 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23절) 묻는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반문하심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한다. 기적과 말씀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5절) 되물으신다. 만약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거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모르겠다”라고 회피한다. 그들의 답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두려움의 결과였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닫혀 있었고, 그러한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해석한다. “그들은 빛이 앞에 있었으나 스스로 눈을 감았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않음이다.”(Hom. in Matth. 68,3) 신앙은 논리보다 겸손히 마음을 여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질문을 단순한 논박이 아니라 자비의 행위로 이해한다. “주님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불신앙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In Io. Tract. 2) 하느님은 언제나 심판보다 회개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신다. 오리게네스는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를 연결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Comm. in Matth. XIII,19) 요한을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바리사이들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회피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증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림 시기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백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 권위는 세상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의 친밀한 일치와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단순히 기적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며 따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림의 기다림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바리사이들처럼 “모르겠다.”라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믿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과 담대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두렵습니까? 그럼 껴안아 보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했던 유명한, 어쩌면 아주 건방져 보이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얼핏 들으면 고객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무지하니까 내가 주는 대로 써!"

이런 느낌이지요.

하지만 잡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고객을 무시한 게 아니라, 고객보다 더 치열하게 고객의 삶을 연구하고 파고들었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두려워서 묻습니다.

"고객님, 이거 좋아하세요? 싫어하세요?" 거절당할까 봐, 안 팔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봅니다.

하지만 잡스는 수천 번의 고민과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까지 이미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

상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두려움이 사라진 경지, 그래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실현하려면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혹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용기를 줍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와 통나무' 이야기 아시지요?

어느 날 연못에 큰 통나무가 '첨벙!'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소리와 물보라에 개구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물속 깊은 곳으로 숨었습니다. 

 

"아이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 개구리들은 벌벌 떨며 감히 쳐다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개구리 한 마리가 슬금슬금 물 위로 올라와 그 괴물을 툭 건드려 보았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그냥 떠 있는 나무토막일 뿐이었습니다.

실체를 알고 나니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중에는 개구리들이 그 통나무 위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통나무는 세상이고 참다원 권위는 그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니 통나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던진 분을 덜 믿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키워가는 방법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가는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통나무를 무서워하는 개구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그들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안 믿었냐고 할 거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이 돌을 던질 텐데…'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습니다.

왜일까요? 지아 장처럼 군중 속으로 들어가 부딪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군중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소리가 더 크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세상이 거대해 보이고, 하느님은 작아 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 13장을 보면 이 대비가 더 명확해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돌아온 10명은 사색이 되어 보고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 같았습니다!"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는 이 패배감.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부재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니, 눈앞의 거인만 보이고 내 뒤의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칼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저 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 앞에서 떨지 않았던 것은, 그가 돌팔매질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나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니 하느님의 크기에 비추어 아주 작게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 부인은 당시 사람들이 미지의 물질인 라듐을

두려워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지금은 더 많이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덜 두려워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려움을 없애고 믿음을 키울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유명한 '뱀 공포증 치료 실험'이 그 힌트를 줍니다.

반두라는 뱀을 보면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뱀을 던져준 게 아닙니다.

첫 단계는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게 합니다.

괜찮으면 다음 단계, 문을 열고 봅니다.

그 다음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뱀 꼬리를 살짝 만져봅니다.

이 과정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진행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놀랍게도 참가자들이 맨손으로 뱀을 만지며 목에 두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생각보다 부드럽네요." 

 

이 실험의 핵심은 '작은 직면(Small Steps)'입니다.

두려움을 쪼개서 조금씩 맛보면, 우리 뇌는 "어라? 안전하네?"라고 학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뱀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반두라의 실험처럼, 매일 조금씩 하느님께 나를 던져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은 가만히 앉아서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스티브 잡스처럼 고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마리 퀴리처럼 위험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윗처럼 물맷돌 하나 들고 거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작은 체험들이 쌓여 우리의 믿음은 거대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피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빽 믿고 딱 한 걸음만,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듯 다가가 보십시오.

그림자를 피하면 괴물이 되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주님과 만나는 성소가 됩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21,23) 

 

'나의 부활의 원천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21,23-27)의 제목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수모와 수난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메시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건만 사람들은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 곧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태클을 걸어왔고, 마침내는 그들 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가시어 골고타 언덕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겪는 수모나 수난은 당연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수모와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부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매일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사제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부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부활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성당엘 다니려고 하고, 기도하고, 힘을 다해 미사에 참례해 성체를 받아모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극진하고도 완전한 사랑 안에 머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부활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고, 사랑이 되려고. 

 

"주님,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화답송) 

 

(~ 느헤9,37)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의 권한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시는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1) 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마태 21,12-13)와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런 일은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이 가끔 생깁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고

 

물은 것은, 공적인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예수님에게 어떤 권한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주신

 

권한으로,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며,

 

메시아이신” 당신의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이고,

 

당시에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은 “아무 권한도 없는 자가,

 

제멋대로 성전에 들어와서 ‘성전 모독죄’를 짓고 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질문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왜 그것을 내버려

 

두었느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냐?” 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요한의 증언도 믿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에게 온 사제들과 원로들은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 라는 것을 안 믿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한을 안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군중이 두렵소.” 라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는 않고, 즉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만일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돌을 던질 것입니다.

 

<결국 사제들과 원로들이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입니다.>

 

“모르겠소.” 라는 말은, 대답을 회피하는 말인데,

 

“요한의 세례와 당신의 권한은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는 요한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사실상 ‘직무 유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어지게 됩니다.

 

성전의 수석 사제 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쪽에서도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답변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왜, 하느님께서 세우신 유대교 안에서

 

일하시지 않고, 밖에서 일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유대교의 율법과 전례를 준수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활동은 ‘제도권 밖에서’ 하셨는데, 그것은

 

‘유대교’ 라는 제도권이 위선과 탐욕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만일에 ‘사람의 일’이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즉 구원을 받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아무리 힘들어도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느님의 일’로 믿지 않고

 

‘사람의 일’이라고 깎아내린다면,

 

그것은 곧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일’은 우리를 멸망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일’은 버리고, 또 ‘사탄의 일’은 물리치고,

 

오직 ‘하느님의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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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3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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