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0일 (토)
(자) 12월 20일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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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수원 교구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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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17 ㅣ No.186893

이병우 신부님_"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 

 

'임박한 주님의 성탄!' 

 

오늘 복음(마태1,1-17)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대림시기의 전례가 '11월30일(대림 제1주일)부터 12월16일(대림 제3주간 화요일)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부터인 12월17일부터 12월24일까지는 '그리스도의 성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본격적으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그 첫날에 들려오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세상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의 인성'을, 곧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들어진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뿌리가 있는 역사적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전해집니다.

곧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통일한 임금인 다윗까지'와 '다윗부터 남유다 왕국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여호아킨 임금까지'와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 각각 '십사 대씩' 전해집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아마 어제부터 거의 모든 성당에서 판공성사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판공성사'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하나의 요식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시도록', '내 마음의 구유를 깨끗이 청소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니 잘 준비해서 판공성사를 보도록 합시다. 혹시라도 정해진 날에 판공성사를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성탄 전까지 꼭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통해 잘 준비해서,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본기도) 

 

(~ 느헤13,3) 

 

 

 

전삼용 신부님_모태가 성숙하면 신랑이 나타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2021년에 개봉한 '팔머(Palmer)'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디 팔머는 고교 시절 풋볼 스타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입니다.

그가 출소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차가운 감옥보다 더 혹독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거절당하는 일자리... 그는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버티는 '희망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불청객이 하나 끼어듭니다. 옆집에 사는 소년 '샘'입니다.

마약 중독자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버린 후 홀로 남겨진 아이였지요.

그런데 이 샘이라는 녀석이 좀 독특합니다.

남자아이인데 공주 인형을 좋아하고 머리에 예쁜 꽃핀을 꽂고 다닙니다.

세상은 그런 샘을 '별종'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습니다. 

 

팔머는 처음엔 귀찮았습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처지에 웬 혹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갈 곳 없는 샘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밥을 먹이고 재워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팔머에게 아주 '불편한 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샘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팔머는 샘의 담임 선생님인 '매기'를 찾아갑니다.

"선생님, 애들이 샘을 놀려요.

샘은 그냥... 샘일 뿐인데요." 

 

매기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거친 전과자인 줄만 알았던 팔머의 눈에서,

한 아이를 지키려는 간절한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핼러윈 파티 날이었습니다.

샘이 기어코 공주 복장을 하고 파티에 가고 싶어 하자, 팔머는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다 버립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수하고 샘의 손을 잡고 파티장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갑니다.

그 순간, 늘 겁에 질려 있던 샘은 당당한 '사랑받는 아이'로 다시 태어납니다.

팔머가 세상의 편견을 막아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팔머의 모습을 보며, 매기 선생님의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그녀는 팔머의 과거(전과자)가 아니라, 현재의 사랑(희생)을 보았습니다.

매기는 팔머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에디."

평생 "실패자", "범죄자"라는 소리만 듣던 팔머에게, 매기의 사랑은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만약 팔머가 샘을 귀찮다고 쫓아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전히 외톨이 전과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샘이라는 작은 생명을 품고 살려내자, 그 보상처럼 '매기'라는 사랑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팔머에게 매기 선생님은 곧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껄끄러운 이웃(샘)을 순종으로 받아들여 그를 살려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매기)과

사랑에 빠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은 자에게만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주 길게 나열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남자가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족보의 끝에서 문법이 바뀝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라고 수동태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구원의 역사는 내가 무언가를 쟁취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누군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적 모태가 되어줄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이웃을 순종으로 섬길 때, 그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마니피캇’으로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성경 속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십시오. 천사의 예고를 들은 마리아는 곧바로 늙은 친척

엘리사벳을 도우러 산골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이자 봉사였습니다.

마리아가 도착해서 인사를 건네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엘리사벳 태중의 아이(세례자 요한)가 기뻐 뛰놀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찹니다. 마리아의 방문(순종)이 엘리사벳 모자를

영적으로 깨운 것입니다.

일종의 영적 출산이지요. 엘리사벳 역시 태중의 요한을 하느님의 뜻대로 품어 기르고 있었기에, 성모님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보고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은 이런 식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막연히 기다리는 자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영화 속 팔머가 샘을 받아들였을 때 매기를 만났듯이, 우리가 누군가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주님께서 그에게 황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사울이라는 자에게 안수를 주어라." 사울이 누구입니까?

신자들을 잡아죽이던 공포의 대상, 원수였습니다. 하나니아스는 두려웠지만 "가라, 그는 나의 그릇이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찾아갑니다.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라고 불렀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그가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니아스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의 눈병을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탄생하는 하느님의 역사를 목격했고, 그 현장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바오로는 없었을 것이고, 하나니아스의 하느님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할 '사울'은 누구입니까?

내 고집을 꺾고 불편한 이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기 죽지 않도록 팔머처럼 손을 잡아주십시오.

여러분의 순종으로 누군가가 웃게 되고, 누군가가 신앙의 눈을 뜨게 될 때, 바로 그 자리에 성탄의 예수님께서 와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다시 태어날 따뜻한 구유가 되어줄 때, 그를 태어나게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탄생

마태오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심을 드러내는 신앙 고백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고 다윗의 뿌리에서 나시어, 구원의 약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다.”(Adversus Haereses III,21,3) 즉, 족보는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라, 구원사가 육신 안에 뿌리내린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다. 

 

2. 아브라함과 다윗 안에서 성취된 약속

아브라함에게는 “네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8)는 약속이 주어졌다. 다윗에게는 “네 집안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굳건하리라.”(2사무 7,16)는 언약이 주어졌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묵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고, 다윗의 왕좌가 영원히 세워졌다.”(Enarrationes in Psalmos 132,11)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족보는 약속에서 성취로, 예언에서 실현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드러낸다. 

 

3. 14대씩 세 구분으로 나눈 족보

마태오가 족보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눈 것은 우연이 아니다(17절).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약속의 시대;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까지: 왕국과 몰락의 시대; 바빌론 유배에서 그리스도까지: 기다림과 성취의 시대로 나누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면밀히 인도하시며, 마침내 “때가 차자”(갈라 4,4) 구세주를 보내셨음을 보여 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족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불순종, 심지어 죄까지도 꿰뚫어 구원의 도구로 삼으신 섭리를 본다.”(In Matthaeum Hom. 1,5). 

 

4. 족보 안의 죄인들

이 족보 안에는 의인들만이 아니라, 죄인들과 이방 여인들도 등장한다(타말, 라합, 룻, 밧 세바).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두고 “구세주께서는 죄인들의 족보에 들어오심으로써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드러내셨다.”(De Civitate Dei XVII,20)라고 해석한다. 이는 예수님의 오심이 완전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위한 보편적 구원임을 드러낸다. 

 

5. 대림 시기의 의미

이제 우리는 대림 후반기를 맞아 족보를 묵상한다. 족보는 단지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따라 걷기도 하고, 다윗처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이스라엘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유배와 같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나 구원의 길로 부르신다. 

 

6. 결론

마태오의 족보는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의 증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은 이루어지고, 죄인에게 구원이 선포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는 구원의 절정으로 들어갔다.

이제 우리도 대림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늘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믿음의 이름으로 새겨지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참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

 

우리 가톨릭교회는 오늘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예수님 성탄에 초점을 맞추어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복음 말씀을 배열해 놓았으며, 첫날 우리는 마태오 복음저자가 기술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앞에 섭니다.

 

족보의 사전적 의미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족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 집안의 세력을 과시하고 상징하기 위한 기록물로 취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위조와 허구의 유혹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족보의 사실성과 신뢰성 여부에 늘 의혹이 뒤따르는 이유입니다.

 

물론, 성경(=구약성경)에 정통했던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기록한 마태오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리라는 유다교 전승에 따라,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후손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족보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기보다는, 성경과 성경 밖의 자료들을 정성껏 참조하여 이를 정리해 나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족보에는, 성경에 처음 언급되는 이름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가 복음을 저술한 시기를 대략 기원후 70년경으로 본다면, 이 족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이 족보를 정리했다는 사실로 만족한다면, 이는 마태오의 족보 제시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마태오는 단순한 혈통 관계를 넘어,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서 인간 질서 속에 뛰어드신 분임을 드러내고, 다윗을 훨씬 뛰어넘는 완전한 다윗, 전혀 새로운 또 다른 다윗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족보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조차 주님으로 불렀던 바로 그분 말입니다(마태 22,45; 마르 12,37; 루카 20,44 참조)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면서, 특이하게도 조상들을 열네 세대씩 셋으로 나누는, 곧 14×3이라는 도식을 빌립니다(17절). 히브리어로 잠깐 들어가 보면,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순번을 매길 때, 우리는 1,2,3 등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글자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파벳 a,b,c 또는 위대한 한글 ㄱ,ㄴ,ㄷ 등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이때 a와 ㄱ은 ‘1’을, b와 ㄴ은 ‘2’를 대신하는 수적 표기가 됩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글자는 각각 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 다윗(dwd)은 세 개의 자음으로 되어 있어 이미 3이라는 숫자가 나오고, 그 세 자음의 수치를 합하면 (히브리어 글자 순으로, d/4번째 글자 + w/6번째 글자 + d/4번째 글자 =)14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마태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윗의 이름을 수치로 완전히 풀어헤쳐, 예수님을 완전한 또 다른 다윗으로 말하기 위해 14×3이라는 도식을 빌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마태오는 족보 제시를 통해 예수님은 참사람으로 우리 한가운데로 오시는 분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 이상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참 인격을 지니신 예수님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사회의 약자들,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모습 속에서 그분의 인격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대림시기는 참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려 애쓰는 가운데,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웃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들, 그러나 지금은 어려운 처지에서 허덕이거나 몸부림치는 이웃들을 향해 조금만 더 내려가는, 너그럽고 여유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송영진 신부님_<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요셉’만 보느라고 ‘예수님’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

 

협력자들의 응답과 협력을 묵상하는 것이 옳은 순서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뒤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도

 

동방박사들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임금(메시아)’이신 분,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가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일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고한

 

일인데, 요한의 출생은, 즈카르야의 믿음과 응답 여부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루카 1,20).

 

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고한 일인데,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는 다르게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루카복음 1장 38절에 있는,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천사가 마리아의 응답을 기다렸다가,

 

그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셨다면?

 

그러면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요셉의 경우에 대해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기

 

전에 먼저 요셉에게 가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려 주었다면?”이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미리’ 알았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만일에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처음부터 사람들이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의심하는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힘’이 전혀 개입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동정 잉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 일이 완전히 이루어진 다음에

 

요셉에게 알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셉이 천사의 말을 믿었다는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신심과 인품과 성덕을 요셉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리아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가

 

요셉에게 알려 주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어떻게든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결심했다.”입니다.

 

요셉이 파혼하려고 한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었으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파혼을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즉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가 안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몹시 고민하고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를 겉으로만 읽기 때문이고, 세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짧은 생각입니다.>

 

 

 

4)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말부터 하는데, 천사의 말은, 아기와

 

마리아의 보호자가 되라고 ‘임무’를 맡기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가 잉태되었다는 설명은, 마리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보증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성령께서 성가정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겉으로만 읽으면, 요셉이 갑자기 일어난 일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하다가 천사 덕분에 힘을 얻어서

 

응답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분명히 요셉은

 

마리아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건하고 흠 없고 ‘강인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받은 부르심에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얼떨결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신에 가득 차서 기꺼이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 점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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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2월 18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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