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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수원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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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의로운 요셉
복음저자 마태오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정하는 유다인들로 구성된 70년 이전의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고대 유다교에서 유래한 전승이 도처에 퍼져 있습니니. 이 점에서 첫째 복음서는 확고하게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는 작품으로서, 율법의 위상과 지위에 관한 질문(특히 5,17-20),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의로움의 실천에 관한 질문(3,15; 5,6.10.20; 6,1.33; 21,32) 등이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다소 보수적이며 배타적이었던 이 공동체 안에서 의(義)라는 개념은 우선 율법 준수로 좌우되는 개념이었으며, 따라서 의인은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이”(루카 1,6)를 가리켰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의인으로 자처했던 것은 스스로 율법 준수에 충실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마도 이러한 의미의 의인이었다면,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했을 것입니다(신명 22,23-24 참조).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요셉에게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율법 준수에 매몰되어 있던 의 개념, 단죄하고 응징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생명을 위한, 구원을 위한 의 개념을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완전하고 적극적인 의인 요셉에게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하달되며, 요셉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수용에 이어 요셉이 하느님의 계획을 수용함으로써,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영원히 머무시게 된 것입니다(마태 28,20).
요셉이 마음에 품었던, 그리고 그대로 실천했던 이 의(義) 개념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이시지만, 자비로움과 너그러움이 늘 함께하는 하느님이시기에,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리사이들과 달리, 구원은 하느님 자비의 결과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 하고 읊었던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넉넉한 하루,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에 옮기는 가운데 구원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1. 성령으로 잉태된 구원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18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한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태중에서 태어나신 것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함이었다.”(Oratio 38,13) 그리스도의 성령 잉태는 우리의 새로운 탄생, 곧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됨을 예표한다(요한 3,5).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이신 것은, 교회도 성령으로 새로운 자녀를 낳기 때문이다.
2. 의로운 요셉 요셉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동시에 자비의 사람으로서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19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해석하며 말한다. “요셉은 율법을 넘어선 사랑을 택했다. 그는 마리아를 고발하지 않음으로써 율법의 문자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했다.”(In Matthaeum Hom. 4,3) 천사는 요셉에게 두려움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맡기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요셉은 믿음 안에서 율법의 의로움에서 복음의 순종으로 나아간다.
3. 예수: 구원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히브리어 예호수아)라는 이름은 곧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이름이 곧 그분의 사명이다. 구세주께서 오신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Sermo 18,2) 구원은 단순히 정치적 해방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4.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마태오는 이 모든 일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3절). 성 이레네오는 이를 묵상하며 말한다.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인간은 다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얻게 되었다.”(Adversus Haereses III,20,2)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이 되셨다.
5. 요셉의 순종과 우리의 응답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24절)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역사에 협력하는 의인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요셉은 주님의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여, 구세주의 양부이자 성모의 보호자로서 구원의 신비 안에 참여하였다.” (56항) 우리 역시 요셉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새롭게 상기시켜 준다. 마리아는 성령의 순종을 통해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고, 요셉은 의로운 순종을 통해 구원의 역사에 협력했으며,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자, 죄에서 구원하시는 참 구세주이십니다. 대림 시기의 우리는 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님께서 오실 자리를 순종과 신뢰로 준비해야 하겠다.
전삼용 신부님_도망치고 싶은 관계 속에 숨겨진 보물
찬미 예수님! 오늘은 아주 특별한 성탄 연극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1966년 미국의 잡지 『가이드포스트(Guideposts)』에 소개되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9살 소년, '월리(Wally)'의 실화입니다.
월리스 펄링, 애칭으로 월리라 불리는 이 소년은 또래보다 덩치는 훨씬 컸지만, 지능이 조금 낮아 2학년에 머물러 있는 느린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비단결처럼 곱고 순수한 아이였지요.
성탄절 학예회 때 선생님은 월리에게 '여관 주인' 역할을 맡겼습니다. 대사를 외우기 힘든 월리를 배려해서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 배역을 준 것입니다. 게다가 월리의 큰 덩치가 요셉과 마리아를 위협적으로 쫓아내기에 딱 좋다고 생각했겠지요. 월리의 대사는 이것뿐이었습니다.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드디어 공연 날, 무대 위로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왔습니다. "여관 주인님, 제 아내가 만삭이라 너무 힘들어합니다. 작은 방이라도 없나요?" 월리는 연습한 대로 근엄하게 소리쳤습니다.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하지만 요셉 역을 맡은 아이가 대본에 따라 더욱 애처롭게 간청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부탁입니다. 아내는 지쳤고 날은 춥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습니다." 그 순간, 월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각본대로라면 매몰차게 문을 닫고 들어가야 했지만, 월리는 문고리를 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마리아가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대 뒤에서 선생님이 다급하게 속삭였습니다. "월리! 문 닫아! 안 된다고 해!"
하지만 월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각본에는 없는 대사를 외치고 말았습니다. "가지 마세요! 요셉! 마리아! 제 방으로 오세요! 내 방을 쓰세요!"
월리는 엉엉 울면서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고, 연극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날 밤, 그 어떤 완벽한 연극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월리만이 진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방을, 자기 삶의 자리를 내어준 유일한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이 처한 상황이 딱 이와 같습니다.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그녀를 고발해야 했고, 인간적으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인생에 불쑥 찾아온, 감당하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불청객이었습니다. 요셉의 '인생 각본'에는 없던 일이었지요.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월리의 대사처럼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하며 관계를 끊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요셉이 위대한 성인인 이유는, 자신의 각본을 찢고 하느님의 각본대로 "내 방을 쓰세요" 하며 부담스러운 마리아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부담스러운 여인을 받아들인 바로 그 자리에서, 요셉은 구세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약 요셉이 부담을 피해 도망쳤다면,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결코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 안에는 이런 요셉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가경자 엘리자베스 레스외르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에게 남편 펠릭스는 평생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지독한 무신론자 의사였던 펠릭스는 아내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남편은 피하고 싶은 짐이자, 가장 '부담스러운 마리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논쟁하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침묵과 사랑으로 남편이라는 짐을 껴안았습니다.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펠릭스는 아내가 남긴 영적 일기를 읽고 통곡하며 회심합니다. 그는 훗날 도미니코회 사제가 되어, 아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을 제대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이라는 짐을 통해 성인을 낳았고, 남편은 아내라는 짐을 통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억지로 짐을 졌다가 주님을 만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로마 병사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했습니다. 그에게 피투성이가 된 죄수의 십자가는 끔찍한 불운이자 피하고 싶은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부담스러운 십자가(사명)를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발을 맞추어 골고타를 오르는 동안, 그는 예수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고 그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데르와 루포스는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신자가 됩니다. 억지로 진 짐이 그를 구원자와 만나게 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호세아 예언자를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에게 "가서 창녀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고메르는 결혼 후에도 계속 바람을 피우고 도망갔습니다. 호세아에게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수치이자 고통스러운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도망간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찾아오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찢어지는 마음(Compassion)을 체험합니다. 그는 인간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이 부담스러운 여인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계시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기도합니다. "주님, 저 사람만 없으면 살겠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과 예화들은 정반대의 진리를 말해줍니다. "네가 피하고 싶은 그 사람,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그 관계가 바로 내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모든 관계는 우연이 아닙니다. 나를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는 시몬의 병사이거나, 나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끄는 호세아의 아내일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라는 부담을 끌어안았을 때 예수님을 품에 안았듯이, 우리도 내 인생의 각본을 찢고 "내 방으로 오세요"라고 말할 때, 그 관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 만나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보다는 '이 관계를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만나주실 것인지'를 먼저 묵상하는 대림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1,20ㄴ)
'불가능을 가능으로!'
오늘 복음(마태1,18-25)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 태어나십니다. 때문에 결정적인 도구가 필요했고, 마리아가 그 도구로 선택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입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에 있었던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순간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당신의 천사를 잠자는 요셉에게 보내시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ㄴ-21)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니, 처녀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여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는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녀들은 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곧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개입, 곧 성령의 힘에 나의 온 존재를 내어 맡기며 살아가는 복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시다!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송영진 신부님_<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요셉’만 보느라고 ‘예수님’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
협력자들의 응답과 협력을 묵상하는 것이 옳은 순서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뒤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도
동방박사들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임금(메시아)’이신 분,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가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일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고한
일인데, 요한의 출생은, 즈카르야의 믿음과 응답 여부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루카 1,20).
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고한 일인데,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는 다르게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루카복음 1장 38절에 있는,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천사가 마리아의 응답을 기다렸다가,
그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셨다면?
그러면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요셉의 경우에 대해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기
전에 먼저 요셉에게 가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려 주었다면?”이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미리’ 알았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만일에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처음부터 사람들이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의심하는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힘’이 전혀 개입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동정 잉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 일이 완전히 이루어진 다음에
요셉에게 알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셉이 천사의 말을 믿었다는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신심과 인품과 성덕을 요셉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리아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가
요셉에게 알려 주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어떻게든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결심했다.”입니다.
요셉이 파혼하려고 한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었으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파혼을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즉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가 안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몹시 고민하고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를 겉으로만 읽기 때문이고, 세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짧은 생각입니다.>
4)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말부터 하는데, 천사의 말은, 아기와
마리아의 보호자가 되라고 ‘임무’를 맡기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가 잉태되었다는 설명은, 마리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보증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성령께서 성가정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겉으로만 읽으면, 요셉이 갑자기 일어난 일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하다가 천사 덕분에 힘을 얻어서
응답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분명히 요셉은
마리아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건하고 흠 없고 ‘강인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받은 부르심에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얼떨결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신에 가득 차서 기꺼이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 점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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