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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8일 (목)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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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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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1-06 ㅣ No.187242

전삼용 신부님_2026년 가해 주님 공현 후 화요일 – 화단에는 가뭄에도 물이 쏟아진다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농구 좋아하십니까? 미국 대학 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UCLA의 존 우든 감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분은 전무후무한 88연승과 10회 우승이라는, 말 그대로 '기적' 같은 기록을 세운 명장입니다. 신입 선수들이 잔뜩 긴장해서 첫 훈련장에 모이면, 명장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농구공 대신 양말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자, 양말을 신을 때는 주름이 하나도 잡히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 신어야 한다. 그리고 신발 끈은 구멍마다 꽉 조여 매라."

선수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천하의 명장이 유치원생도 다 아는 양말 신기를 가르치다니요. 하지만 감독의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양말에 주름이 잡히면 발에 물집이 생긴다. 물집이 잡히면 뛸 수가 없다. 네가 못 뛰면 팀이 진다."

기적 같은 승리는 화려한 덩크슛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양말을 제대로 펴 신는 그 사소한 '질서'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기초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경기라는 거대한 흐름도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빵이 불어난 결과에만 감탄하느라, 그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아주 중요한 행동을 놓치곤 합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를 잡게 하셨다.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왜 굳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들을 앉히고, 줄을 세우셨을까요? 그냥 빵을 공중에서 뿌리거나, 선착순으로 나눠주면 안 됐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겁니다. 힘센 사람만 먹고 약자는 밟혀 다쳤겠지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폭동입니다.

여기서 '떼를 지어'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본래 '화단의 꽃들이 가지런히 심어진 모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혼란스런 군중을 아름다운 꽃밭처럼 정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곧 기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은총은 담기지 않고 쏟아져 버립니다.

우리 삶의 현장을 봐도 그렇습니다. 기적은 철저한 질서 위에서 피어납니다.

불과 1년 전이었지요. 2024년 1월 2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여객기가 착륙 직후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는 불덩어리가 되어 활주로를 달렸고, 기내는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누가 봐도 대참사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승무원들은 고장 난 인터폰 대신 확성기를 들고 외쳤습니다. "짐을 버리십시오! 짐을 꺼내지 마십시오!"

생사가 오가는 순간, 내 가방을 챙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대로 했다면 통로는 막히고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무질서를 멈추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비행기가 전소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분이었지만, 탑승객 379명은 전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짐을 버리는 질서'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는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어디 인간사뿐이겠습니까. 자연을 보십시오. 꿀벌들이 모아온 꿀은 액체입니다. 그냥 쌓아두면 다 흘러내리고 맙니다. 그래서 벌들은 '육각형'이라는 가장 완벽한 질서의 형태로 집을 짓습니다. 빈틈없고 가장 튼튼한 그 구조 덕분에 벌집은 자기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을 저장합니다. 육각형이라는 질서가 없으면, 꿀이라는 풍요는 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는 본래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듭니다. 그런 혼돈 속에는 은총이 내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기드온을 보십시오. 적군 미디안은 13만 5천 명인데, 기드온의 군사는 고작 300명이었습니다. 전면전, 즉 무질서한 싸움을 하면 전멸이 뻔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칼 대신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을 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하여라"는 엄격한 행동 수칙을 주십니다. 그들이 약속된 신호에 맞춰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질서를 지켰을 때, 적군은 공포에 질려 자기들끼리 칼부림하다 자멸했습니다. 300명의 질서가 13만 명의 무질서를 이긴 것입니다.

이처럼 질서만 잡혀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그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크림 전쟁 당시의 나이팅게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야전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의 사망률은 42%였습니다. 총상 때문이 아니라 오물과 무질서 속에서 감염되어 죽어갔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한 일은 거창한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청소를 하고, 환자의 침대를 줄 맞춰 정리하고, 환기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망 원인을 꼼꼼하게 통계표로 만들었습니다. 아수라장이 평화로운 질서의 공간으로 바뀌자, 6개월 만에 사망률이 2%로 급감했습니다. 그녀가 부여한 '질서'가 곧 수천 명을 살리는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질서의 힘은 빛을 발합니다. 1914년, 남극 탐험 중 배가 부서져 얼음 위에 고립된 어니스트 섀클턴 대장과 28명의 대원 이야기를 아십니까? 영하 30도의 추위와 고립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 섀클턴 대장은 엄격한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축구를 하고, 머리를 깎게 했습니다. 심지어 유머 시간까지 정해서 웃게 했습니다. 그는 무질서한 감정이 침투하지 못하게 일상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634일간 표류했지만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생존하여 귀환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그들을 살린 건 따뜻한 난로가 아니라, 영혼을 지켜주는 차가운 질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주 드리는 이 미사 전례(Liturgy)야말로 우리 삶의 질서를 잡는 가장 거룩한 틀입니다. 전례는 딱딱한 형식이 아닙니다. 무질서한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 영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섀클턴의 루틴이자, 은총을 담는 벌집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혼돈 그 자체였을 때, 문명을 구한 것은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그 혼란 속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엄격한 생활 규칙을 세웠습니다. 수도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먹고, 기도했습니다. 그 수도원 담장 안의 평화로운 질서는 암흑시대를 밝히는 등대가 되었고, 그 안에서 유럽의 문명은 다시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질서는 벌써 평화이고, 그 평화가 기적을 초대합니다.

올 한 해, 거창한 계획보다 사소한 질서를 세워보십시오. 존 우든 감독이 양말을 펴 신게 했듯,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 단순한 규칙(Regula)이 여러분의 영혼을 육각형 벌집처럼 튼튼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은총이, 낭비되지 않고 여러분의 삶이라는 그릇에 가득 담길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복음: 마르 6,34-44: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 복음은 잘 알려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전해준다. 굶주림을 아시는 주님,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지신 주님께서 수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은 먼저 말씀으로 영혼을 먹이시고, 이어서 빵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신다.

 

기적이 일어난 곳은 “외딴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황량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충만의 자리였다. 성 예로니모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빈들에서 군중을 먹이신 것은, 율법의 메마름 대신 복음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In Matth. 14,19)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황량하고 외로운 순간이 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순간은 은총의 시간이 되고, 구원의 공간으로 변한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주님께 내어놓자, 풍성한 기적이 일어났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군중을 먹이게 하셨다. 이는 교회에 맡겨진 성찬의 직무와 가르침의 사명을 예표한다.”(Hom. in Matth. 49,1)

 

즉,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당시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 교회에도 주어지는 명령이다. 본당 공동체는 각자의 작은 봉헌을 모아 주님께 드림으로써, 세상 안에 하느님의 큰 일을 이루는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성찬례와 연결한다. “주님은 빵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셨다. 이것은 성찬의 전형이다. 작은 빵이 무리를 먹였듯이, 작은 성찬이 온 세상을 먹인다.”(Sermo 130,2) 성찬례는 곧 감사(Eucharistia)이다. 우리가 일상의 작은 은총에도 감사할 때, 부족해 보이는 삶은 충만한 자리로 변한다.

 

열두 광주리에 남은 조각은 단순한 과잉이 아니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열두 광주리에 담긴 것은 사도들의 손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을 드러낸다. 이는 교회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함을 보여준다.”(De Unitate Ecclesiae, 23)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성사를 거행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 속에 나눔과 사랑의 빵을 퍼뜨리는 자리이다.

 

오천 명의 군중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갈망을 지닌 인류 전체를 상징한다. 주님은 그 갈망을 채우시는 참된 빵,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초대합니다. 가진 것을 작다고 움켜쥐지 말고 주님께 내어놓을 것, 받은 은총을 늘 감사할 것,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 나눔의 기적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 황량한 외딴곳은 은총의 장소로, 늦은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변화될 것이다.

 

 

송영진 신부님_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이 진짜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 6,34-44).”

 

 

 

1)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의 심정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다.”

 

라는 ‘비참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입니다.

 

그의 몸은 잘 먹어서 ‘좋은 몸’이 되겠지만, 그의 영혼은

 

병들고 굶주린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만일에 본인이 그것을 끝끝내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혼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34절의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이 불쌍한 처지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영혼도 병들어 있었다는 것.

 

<어쩌면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남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이 너무 아프면 남의 아픔을 생각할 틈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더욱 이기적으로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양처럼 각자

 

혼자서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고 걱정한 것은 분명히 ‘사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돈도 없었고 빵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빵의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부각시키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일입니다.

 

물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의 재료로 사용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천 명 이상의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기적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기적을 일으킨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드실 때, 인간 쪽에서 그 기적에

 

동참하고 협력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1)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과 안식과 평화’를 체험했습니다.

 

(2) 사람들이 ‘기적의 빵’을 먹을 때, 그곳에서는 아무도

 

차별당하지 않았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았습니다.

 

(3) 그 빵을 먹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기심이 사라졌고, 그들은 ‘모두 함께’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기적과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킨 기적,

 

그렇게 두 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빵의 기적’은 한 끼 식사로 끝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된 일은, 각자의 노력에

 

따라서 그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모두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먹거나 함께 굶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갈등과 분열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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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1.6)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34ㄱ)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인 사랑! 

 

오늘 복음(마르6,34-44)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의 허기진 배도 채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니,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낮은 곳, 그늘진 곳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실행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오늘 독서(1요한4,7-10)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4,7-10)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졌고, 지금도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안성기 사도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유딧16,17) 

 

PS: 신부님 저도 같이 안성기 사도 요한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아멘 

 

김건태 신부님_목자 없는 양

 

오늘 예수님은 많은 군중 앞에 서십니다. 그런데 군중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양은 시력이 극히 나빠, 눈앞에 무엇인가 보이고 그것이 움직이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것이 늑대와 같은 먹이사슬 상위 동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목동들이 양떼를 칠 때 염소 몇 마리와 함께 치거나, 또는 양치기 개를 별도로 훈련시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리가 단단하지 못해 재빠르지 못하고 잘 넘어지며,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서지를 못해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털을 깎을 때나 도살의 순간 온순한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늘 ‘순하다’ 하는 부가어를 달고 다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을 보신 예수님의 첫 반응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입니다. 생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다른 더 좋은 세상은 없는지 알지 못한 채, 정말 견디기 힘든 정신적 배고픔에 주린 사람들에게 바로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러저러한 고통 앞에 왜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자비하시다는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지 몰라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영적 굶주림에서 육체적 굶주림으로 넘어갑니다. 그 유명한 빵을 많게 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전능으로 무에서 기적을 이루어내실 수 있음에도, 예수님은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어서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자리 잡게 하신 후,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라고 이르십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을 모아 담아둔 열두 광주리는 이제 열두 제자에게 하나씩 분배될 것입니다. 한 무리씩 맡아 영적이며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미사성제의 핵심 부분인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그대로 드러남을 봅니다.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빵으로 배부르게 해 주시는 주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는 말씀으로, 이제 우리가 가르치고 배부르게 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올해에는, 주일은 물론 평일 미사에도 자주 참여하여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음을 참 행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자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을 영적, 육적으로 보살펴 나갈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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