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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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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수원 교구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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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1-07 ㅣ No.187262

김건태 신부님_나(는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놀라운 기적을 행사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군중과 작별하신 다음 산으로 향하십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도 기도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으나,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살피는 일이라면, 하느님의 뜻인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기도는 늘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곧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입니다.

 

이어서 물 위를 걸어가시는 주님이 소개됩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불은 흔적이라도 남기지만, 물은 흔적조차 말끔히 지워버린다는 사실에서도 두려움의 정도는 한층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에서의 물, 노아의 홍수에서의 물, 홍해 바다의 물 등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느님은 이 두려움의 요소들을 제압하시고, 인간에게 새로운 세상과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생명의 원천이든 극도의 두려움의 요소이든, 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을, 주님의 능력을 확인합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뵈면서 제자들은 또 한 번 두려움에 싸입니다. 아직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에게 많은 가르침과 빵의 기적으로 당신이 참 목자이심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양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든 목자로서 늘 함께하시는 분임을 밝혀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시 한번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시키는 일입니다: “나(는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1인칭으로 ‘나(는 있)다’는 본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표현으로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실 때 처음 발견됩니다(탈출 3,14: 3인칭으로는 ‘그[는 있]다’이며, 히브리어로 야훼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는 있)다’ 하는 말씀 속에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더 나아가 하느님이심을 밝히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 표현이 나 여기 있음을, 나 너희와 함께 있음을,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앞으로 어떠한 일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임이 틀림없다는 사실로 충분합니다.

 

어렸을 적 아무리 무섭고 두려운 일이 있어도, 부모님만 옆에 계시면, 부모님의 “나 여기 있어” 하는 말씀 한마디면, 그 모든 두려움이 싹 가셨던 것처럼,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기만 하면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앙인으로서의 성숙을 다져나가는 한 해 되기를 소망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를 건너게 하시고, 그 후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을 전한다. 빵의 기적 직후, 풍랑의 시련이 이어진다. 이는 우리가 은총을 체험한 직후에도 곧바로 시련이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풍랑과 맞바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유혹을 상징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는 본향에서 쫓겨났다. 세속의 바다는 거친 파도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스스로는 건너갈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라는 나무를 주셨으니, 그것을 붙잡고서야 우리는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Sermo 75,4) 즉,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표지가 아니라, 구원의 다리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구원의 방주와 같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자,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 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 드러내시기 전에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셨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영혼은 진리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Homilia in Matthaeum 50,2) 곧, 신앙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 안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우리를 풍랑 속에서도 바로 세운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 교부들은 배를 교회의 표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배는 곧 교회이다.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주님이 그 안에 계시면 교회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Commentarium in Matthaeum, XI, 6)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모실 때, 인생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안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 홀로 풍랑을 이겨내려 할 때 우리는 오히려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초대한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붙잡을 것; 두려움 속에서도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 교회의 배 안에서 주님을 모시고 항해하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당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제자들을 풍랑 속에 내버려두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오셔서 구원하셨다.”(Homiliae in Evangelia, XIV, 3)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풍랑과 맞바람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더욱 깊이 십자가를 마음에 모셔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내적 바람은 잠잠해지고, 하느님의 평화가 찾아온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풍랑 속에서 어디에 의탁하는가?” 십자가 없는 인간의 힘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믿고, 그분을 마음에 모신다면, 우리 삶의 바다는 더 이상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구원의 길이 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전삼용 신부님_2026년 가해 주님 공현 후 수요일 – 당신은 성체를 소화시키십니까, 압도당하십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호수 한가운데서 죽을 고생을 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지금 역풍을 만나 노를 저을 힘도 다 빠져버린 탈진 상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토록 기다리던 스승님이 오셨으니 환호성을 질러야 맞지 않습니까? "이제 살았다!"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유령이다!" 하고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휩싸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이유를 아주 뼈아프게 꼬집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들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빵은 그저 '배고픔을 해결해 준 맛있는 공짜 밥'이었을 뿐, 그 빵을 만드신 분이 '자연 법칙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까지는 닿지 못했던 것입니다. 빵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봐도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겪는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에 와서 성체를 모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생의 배는 여전히 풍랑 속에서 요동칠까요? 왜 성체를 영하고 나서도 뒤돌아서면 불안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소화'시키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마치 영양제나 비타민처럼 생각합니다. "이거 먹으면 좀 힘이 나겠지? 위로가 되겠지?" 성체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성체를 이용하려 드니, 그 엄청난 하느님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갇혀버립니다.

 

성체는 그러나 우리가 소화시키는 음식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성체가 우리를 삼키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앞에 완전히 '압도(Overwhelmed)'당해야 합니다.

유럽을 제패했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아실 겁니다. 그가 말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장군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였습니까? 아니면 황제 대관식이었습니까?"

나폴레옹은 잠시 침묵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니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내가 첫 영성체를 하던 날이었네."

세상 모든 나라를 정복했던 황제조차, 그 작고 하얀 빵 조각 앞에서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성체는 내가 정복하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정복하러 오신 왕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영성체 순간, 쓰고 있던 나의 왕관을 벗어 놓는 것, 그것이 압도당하는 자의 평화입니다.

이 '압도됨'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분이 있습니다. 바로 복자 임멜다 람베르티니입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임멜다는 성체를 너무도 갈망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성체가 그녀에게 날아왔고, 사제가 영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성체를 모신 직후, 그 기쁨과 사랑의 무게를 육체가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습니다. 하느님의 실재가 너무 커서, 육신이라는 그릇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랑의 죽음'이라 불렀습니다. 죄가 머물 육신조차 남기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된 완전한 평화, 이것이 성체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체 앞에서 이렇게 압도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비타민 먹듯 성체를 대하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기습(Ambush)'당할 용기를 내십시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완벽한 무신론자였던 앙드레 프로사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친구를 기다리러 우연히 성당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감실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성당을 나온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쓴 책 제목이 『하느님은 계시다, 나는 그분을 만났다』입니다. 그는 어떤 논리적 설득도 없이, 단지 성체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감에 기습당했습니다. 성당에 앉아 계실 때, "주님, 저를 덮치십시오. 저를 기습해 주십시오"라고 청해 보십시오. 무방비 상태로 그분께 노출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둘째, 말씀을 배우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낯선 나그네와 식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그 나그네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손님이 주인(Host)이 되는 순간, 그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성체 때 내가 예수님을 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는 나고 객체는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압도당하려면 주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뜨겁게 듣지 않았다면 그분의 실체를 볼 수 있었을까요? 성체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셋째, 분석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십시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사목하던 아르스 본당에, 매일 성당 맨 뒷자리에 앉아 감실만 쳐다보는 늙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묵주도, 기도서도 없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루 종일 거기 앉아서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저는 그분을 쳐다보고, 그분은 저를 쳐다봅니다(I look at Him, and He looks at me). 그거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도 너무 말이 많습니다. 분석하고, 청하고, 따집니다. 압도당한다는 것은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저 그분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는 것, 그 '눈맞춤' 속에 모든 평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히 제일 좋지만, 성체가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주 그분을 인식하려고 하면 됩니다. 성체께 드리는 짧은 기도를 정해서 자주 바치십시오. 저는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꽃을 발견하게 하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자주 바치려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제 안의 예수님 심장이 저를 압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에 압도당한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리스트의 제자이자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헤르만 코헨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의 부탁으로 성당 성가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믿음이 없었지만 성체 강복 때 사람들이 무릎을 꿇자 예의상 고개를 숙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그를 감전시켰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었고, 훗날 가르멜 수도회 신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몸의 예의'라도 갖추십시오. 정성껏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그 '형식'이 때로는 내용인 은총을 담는 피뢰침이 되어 하느님의 번개를 맞게 합니다.

성녀 글라라 역시 이 '압도적인 현존'을 믿었기에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사라센 군대가 수녀원을 덮쳤을 때, 그녀는 칼이 아니라 성광을 들고나갔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들을 지켜주소서." 그 작고 하얀 빵에서 나오는 광채에 압도된 군대들은 공포를 느끼고 도망쳤습니다. 성녀가 성체를 단순한 빵이 아닌 '절대 권력'으로 믿었기에 전쟁의 공포가 침범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성체성사를 묵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우리를 먹어치워야 한다."

내가 빵을 소화시켜 내 에너지로 삼으면 나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거대한 불길이 나를 삼켜 태워버리면, 내 안에는 재(Ash)와 예수님만 남습니다. 재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재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 깨끗함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성체를 모시러 나오실 때, 비타민을 먹으러 나오지 마십시오. 나를 삼키러 오시는 사자(Lion) 같은 하느님을 만나러 나오십시오. "주님, 제가 당신을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압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먹어주십시오."

그분이 내 인생의 배에 '하느님'으로 탑승하시는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맞바람은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그 거룩한 평화 속으로 항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자!'

 

오늘 복음(마르6,45-52)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제자들을 배를 타고 먼저 가게 하시고,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인사 발표가 나서 분주함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1.16(금) 10시 미사 후에 새로운 소임지로 이동합니다. 이번에 맡게 된 사목은 '농어촌사목과 가톨릭농민회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담당'입니다. 만나는 신부님들마다 어려운 사목을 맡았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계속 본당 사목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제들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제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응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그리고 사제들이 걸어가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너머에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4,18)

(~ 에스2,23)

이병우 루카 신부

 

PS: 신부님 응원합니다. 주님 같이 하실 것입니다. 강론은 계속하시는 지요? 

 

송영진 신부님_<“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5-52).”

 

 

 

1) 여기서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수 한가운데에 내버려두신 이유와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가신 이유를 나타냅니다.

 

‘빵의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즉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빵’만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을 올바른 깨달음과 믿음으로 인도하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바람이 불고 있는 호수로 보내셨고,

 

호수 한가운데에서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말하자면, 성찰과 묵상의 시간을 갖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려고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일이고, 그것은

 

자연법칙을 만드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 9,8).

 

그래서 그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만물의 주님이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 일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그런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2)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먼저 가게 하시고” 라는 말은,

 

‘빵의 기적’ 후에 서둘러서 군중과 제자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군중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을

 

막으려고 하신 일입니다.>

 

그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아마도 열광적인 분위기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을 배불리 먹일 지도자가 나타났다는 것.>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서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달라고

 

간청할 때, 제자들은 그런 군중의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크게 동요했을 것입니다.

 

호수 한가운데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밤의 어둠’과 ‘맞바람’은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왜 군중의 요청을 거절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군중이 요청하기 전에 제자들이 먼저

 

원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고, 자기들도 왕권에 참여하기를...>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제자들의 흥분이 가라앉았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의미를 다시 묵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믿음의 시작 단계였고,

 

믿음이 완성된 때는 ‘부활 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는

 

것은, 제자들의 흥분이 가라앉게 된 것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제자들은,

 

그런 분께 작은 민족의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큰 무례’를 범한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탈출 33,18-23; 1열왕 19,11).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린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유령처럼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빵의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배고픔이나 해결해 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신 분이다.”가

 

‘빵의 기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하는 것은, 세속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지만,

 

‘일용할 양식’은 글자 그대로 오늘 먹을 양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희망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는 양식은,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요한 6,27).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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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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