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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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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everycan] 쪽지 캡슐

2002-07-20 ㅣ No.36322

나는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신부님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월요일마다 골프장에 부킹해놨다며 그다지 내켜하지도 않는 신부님을 억지로 필드에 끌어내는 돈많은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그렇게 돈많은 그들이, 신부님 모시고 골프장은커녕 볼링장 갈 형편도 못되는 우리집과 비슷한 액수의 교무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기절할 뻔 했다.

 

나는 강론 때마다 돈 얘기로 시작해서 돈 얘기로 끝내는 신부님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천주교는 주일 헌금을 천원만 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몸소 착실히 실천하는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천주교 신자들은 태반이 생활보호대상자인가 보다.

 

나는 여성 신자들을 유독 가까이 하는 신부님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신부님 옆에 딱 들러붙어 애인이나 남편에게나 하듯 콧소리를 내며 ’호호호. 신부님 멋지세요’ 를 연발하는 여성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나중에 ’신부님이 아무개 허리를 슬쩍 감쌌네’하는 둥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들의 입을 통해서다.

 

나는 특정 신자들하고만 대화하는 신부님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신부님 주위를 맴돌며 연신 ’신부님 정말 훌륭하십니다.’란 소리로 비위 맞추기에 열중하는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의 유효기간이 기껏해야 5년이라는 것을 신부님은 아시려나 모르겠다.

 

나는 신부님이 바뀔 때마다 ’멀쩡히 돌아가던 단체를 재개편한다, 사목회를 해체하고 다시 임명한다’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열받는다.

하지만 새로 오신 신부님이 이삿짐도 풀기 전에 쪼르르 달려가 어떻게든 한자리 차지하려고 ’전임신부님은 뭐를 잘못했네, 뭐를 실수했네, 뭐가 문제네’ 하면서 없는 말도 지어서 일러바치는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아마 그들은 다음 신부님이 바뀌시면 그 때도 똑같은 짓을 재현할 것이다.

 

나는 줏대없이 신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신부님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본당의 주인은 신부가 아니라 신자네’하면서 신부님에게 강짜를 부리고 본당을 쥐락펴락하려는 신자들을 보면 더 열받는다.

정작 성당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 매달리셔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실 뿐이다.

 

나는 이렇게 자주 열받는 내 모습을 보면 열받는다.

하지만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이 진짜 신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눈과 귀를 닫는 비겁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을 보면 더 열받는다.

굳이 나섰다가 욕먹지 않을까 두렵고, 괜한 분란만 만드는 게 아닐까 두렵고, 본당의 골칫거리로 여겨질까도 두려워 늦은 시간 여기에나 겨우 글을 올린다.

난 정말 한심한 인간이다...

 

사족)

훌륭한 신부님은 올바른 신자가 만들고, 올바른 신자는 훌륭한 신부님이 만든다.

횡포를 부리는 형편없는 신부님, ’막가파’처럼 행동하는 경우없는 신자.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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