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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남편, 사무장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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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환 [julyang] 쪽지 캡슐

2001-03-30 ㅣ No.18952

저는 5지구의 상봉동 성당에 근무하는 사무원입니다.

밑에 사무원,  관리인의 부당한 해고에 대하여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고

거기에 맞서서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글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성당에 제 남편은 4년동안 사무장으로서 근무했습니다.

 

제 남편은 어려운 집안의 맏아들로서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했다가 저를 만나서

함께 힙을 합하여 늦은 나이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2학년때 우리는 용기 하나로 결혼을 하였고,  우여곡절끝에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서 직장을 다녔었지요.

 

그러다가 잠깐 쉴 때가 있었는데 청량리 사무장으로 일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공채였습니다.   그 때 청량리는 사무장님이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공석중이었습니다.

청량리성당은 남편이 중,고등학생시절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열심히 활동을

한 성당이고 청년시절에는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저와 인연을 맺은 우리

신앙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젊은 나이와 또 어렵게 공부한 것이 아까워서 사무장을 선택

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만해도 IMF전이었고,  토요일과 주일에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며 새벽부터

늦게까지 근무해야 하고,  다들 아시겠지만 열악한 급여로 모두가 기피하는

직종이었습니다.   지금은 사회분위기상 인기있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며칠을 기도하며 고민하는 남편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무조건

떠났던 막막한 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빵빵하게 월급 많이 받는 직장은 아니었더라도

거의 삼분의 일이라는 액수가 작아진 사무장 자리에 가겠다고 결정 했을 때

제 어깨도 무거웠습니다.   그 자리가 하느님 대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스럽고 감사합니다.

우리 본당 사무원이 수녀원으로 가게 되어 후임자를 구하던중...

제가 지원한 것도 아닌데 본당 신부님의 기혼자에 대한 깊은 배려로

본당 사무실에 제가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신부님은 기혼자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을 크게 보셨습니다.

 

본당 사무실의 일은 크게 회계업무와 교적 즉 신자관리 업무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일들을 둘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하더라도 보통 회계는 사무장님이 하시고

교적관리, 영세등... 신자관리는 사무원들이 합니다.   그렇게 각각 고유업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사무원이 사무장의 시다발이(?)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이 전산으로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도 아닙니다.   저도 사무원으로 근무하지만 제 업무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신자들의 이름만 들어도 세례명을

거의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본당의 신자들을 마음 안에 품고 살아갑니다.

할머니들의 사랑 받으면서 또 사무실에서 일하기 전 함께 봉사했던 자매님들과

협조하며, 새로 전입오는 사람들중 조당에 걸렸거나 신앙에 장애가 있는 신자들과

함께 하여 해결할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고 저절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허락하여 주신 이 직분에서요.

 

저와 남편은 축복받은 이 자리에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날들을 보냈었습니다.

부부가 업무면으로나 심정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본당 신부님의 사랑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던 반면에,

남편은 4년동안 주임신부님을 네 분이나 모셨습니다.   물론 바뀔 때마다 이유가

있었지만 사무장으로서 그 때마다 치뤄야 할일과 적응하여야 할 일등은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저는 옆에서 하느님이 세우신 사제들께 잘 해드리고

사무장으로서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인지

늘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독려하였습니다.

 

그래도 사무원과 호흡을 맞춰가며 잘 이끌어 나가는 사무실 분위기를

저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사무원에게도 저는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남편은 사무장으로 일할 때 동대문 구청장으로부터 '모범시민상' 도 받았습니다.

자신이 왜 그 상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마도 신자들 중 누군가가

사무장을 잘보고 추천한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습니다.   곧은 성격이 때때로 교회안에서 불의와

부딪히는 일은 있었지만 양심을 지키고 살고자 노력하였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20일전 신부님이 부임하셨을 때, 식복사는 미리 알아서 그만두고 며칠후  관리인이

짤리게 되었을 때 "잘 가르쳐서 쓰십시오" 하고 말을 거둘다가 오히려 왜 두둔하느냐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무원의 부당한 해직에 대해서 말이 나올때 누차

그 사무원이 성실하며 자신과 호흡이 잘맞는다고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짐을 싸게 되었을때 함께 일하던 가족들을 지킬 아무런 대책도,  힘도 자신에게

없음을 비참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함께 사직하는 일 뿐이라며 참담한  

심정으로 저의 동의를 구하더군요.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 짤리는데 혼자서 살아 남겠다고 그 자리를 비굴하게

지키는 것은 저조차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남편은 사직서를 냈습니다.   저는 최선은 아니었더라도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담담하더군요.

그러나 하루가 지나면서부터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냥 이 모든 사태들이요.....  

저는 프란치스꼬 성인을 흠모하며 그분의 영성을 따르며 살고자 노력하는

프란치스칸입니다.   평생을 '가난한 자'로 사셨던 사부님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사제들의 손에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제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고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사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분 자신도 수도회 안에서 겸손되이 장상을 거절하고 '작은자'로 머무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의 몫을 내 것으로 하지 말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그저 저의 몫은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 뿐... 그 이상은 내게 없다고

나 자신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남편이나 관리인, 사무원에게도 하느님께서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족한 인간사에서도 완전하게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으니까요.   모쪼록 이런 사태에 대해서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판단하시지 마시고 함께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께도 하느님께서 축복하시어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가운데 기쁜 삶,  열정적인 사목 펼쳐나가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기도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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