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자유게시판

나는 사이비종교의 저급한 신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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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진신부 [yjinp] 쪽지 캡슐

2001-09-02 ㅣ No.23987

+ 주님의 평화 !

 

 

 (적고보니 지나가는 글치고 내용이 너무 길어 음악하나 같이 띄웁니다.

  음악을 들으시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인천교구 교육국장 박 유진신부입니다.

  여기서는 생활음악연구소 지도신부로 좀더 아는 분이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글을 올려야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게시판이 지나가는 자리이고,

  지나치며 한번쯤은 이런 마음도 나누어볼수는 있겠다싶어 써보기로 합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의 길을 걷는 누군가가

  세상 안에서 좋은 향기를 전할 수 있고,

  또 그런 평가를 듣는다는 것은

  같은 종교인으로서 개인적으로도 참 기분좋은 일이지요.

 

  제 자신이 신부이다보니

  아무래도 신부들간에 공적. 사적인 자리에서

  많은 대화들을 하게됩니다.

  

  듣다보면 불교나 개신교를 포함해서

  여러 종교의 훌륭하신 종교인들에 대한 얘기들을

  더러 듣게 됩니다.

 

  교구청에 오기 전

  지역 본당신부로 지내면서

  시민단체 활동이나 더러의 기회들을 통해

  저역시 타종교의 종교인들을 간혹 뵙게된 적도 있었지만

  함께 하는 일들 안에서 기대만큼 별반 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은

  제 인생의 행복하지 못한 또 부끄럽기조차한 경험들이겠지요.

 

  어느 종교를 갖고있는 종교인인가가

  그 사람의 인품을 결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종교인을 키워내는 환경이나 여건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삶은

  더욱 보편적이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데

  이견을 제시할 분은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한 종교에서

  종교인을 양성하는 교육을 담당하는 신학자가

  이렇게 몽매하고 무지할 수 있구나하는

  경악에 가까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 자라나는

  미래의 종교인들을 생각하면

  황당하고 슬프기조차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다른 종교인이

  아래와 같은 글처럼 말한다면 무어라 답변하실건지요.

 

  감정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한번쯤

  자신의 답변을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1> 기독교와 천주교의 비교 연구(1999년 11월호)

 

김명룡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조직신학)

 

가톨릭 교회(천주교)와 개신교회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서론적으로 여러분이 유념해야 할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개신교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발전된 나라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 자유가 신장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열강들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봐서 가톨릭 국가들은 두세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2류 국가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유럽을 살펴봐도, 아메리카 대륙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멕시코를 비롯해서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많은 국가들이 전부 가톨릭 국가인데 한결같이 북쪽에 있는 미국에 비해서 굉장히 뒤쳐져 있습니다.

 

왜,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져 있는가?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논문들을 조사해 보면 가톨릭 정신이 개신교 정신에 비해서 상당히 열등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바꿔 말하면 우리 개신교 정신이 가톨릭 정신에 비해서 월등히 우수한 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교는 국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면 가톨릭이 가장 호감을 갖는 종교로 되어 있어요. 반면 우리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나쁩니다. 불교와 개신교가 비슷하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로 많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개선이 아니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위대한 종교에서 그렇지 않은 종교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전부 우리 개신교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얘기를 계속 들으면 저의 서론적인 얘기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와 가톨릭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가톨릭은 7가지 성사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 성찬, 신품, 고백, 견진, 혼인, 종부 이렇게 7가지죠. 가톨릭교회는 이렇게 성사가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일단 개신교회에도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신품성사라는 것은 신부님이 되는 예식을 얘기하고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얘기하죠. 그리고 이 신품과 혼인성사는 택일입니다. 고백성사라는 것은 일명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님께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에 의해서 원죄가 사해집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통해서 또 이런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집니다. 가톨릭의 교리서를 읽어보면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 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는 전통이 있어요.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를 일컬어서 대죄라고 하고 소죄는 조금 사소한 것을 의미하죠. 예를 들면 살인, 간음, 이간질, 질투, 미사 불참 이런 것들은 대죄에 해당됩니다. 이런 대죄를 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님에게 가서 고해하는 성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이 신부를 비난하는 경우가 개신교에 비해서 월등히 적어요.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회는 자기 죄를 다 숨겨놓고 목사님을 보고 있기 때문에 한 교회 성도들이 다 목사님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이상하면 그것이 걸려서 목사님들이 대단히 혼이 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다 죄를 알죠. 여성들의 경우에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고해하고 나면 한 몇 개월 동안 신부님 얼굴을 뵙기가 어려워서 도망 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신부님이 나타나면 숨어버리고 물론, 신부님이 고해한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봐요.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이 술을 마시고 혹시 실수를 했다고 해도 "어떻게 신부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하고 대들려고 하다가도 신부님이 딱 눈만 크게 뜨고 보고 있으면 전부다 고개가 수그러들게 되어 있죠. 그런데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 해요. 반드시 신부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심이 깊을수록 고해성사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용서가 되지 않으면 구원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가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데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해 사제가 원죄를 사하고, 신부가 원죄를 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미사를 드리며 성찬을 할 때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 죄가 용서되는 순간이죠.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신부를 통해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네 죄를 사하노라" 하는 그 순간에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가 있어요. 중세 때 가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는데, 물론 지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아먹지는 않죠.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신학적인 이론이 변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대단히 교육적인 방법으로 일을 행합니다. 죄를 크게 지은 사람일 경우는 그냥 용서를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 시설 등에 보내서 그곳에서 1주일, 2주일 정도 봉사하게 한 다음 죄를 용서해 줘요. 제가 볼 때는 상당히 교육적인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건강이 나쁘신 분이, 그러나 재력은 있는 분이 고해를 했고 죄가 대단히 중할 때 "당신은 장애인 시설에서 가서 일할 수가 없으니까 대신 장애인 시설을 만들 돈을 헌금하시오"라고 얘기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벌써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는, 중세에 있었던 면죄부 팔아먹는 것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진입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쁜 마음을 먹으면 지금도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있는 이론적인 기초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신부가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견진성사라는 것은 우리 개신교회의 어느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해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입교문답과 약간 닮은 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던 아이들이 장성하게 되면 신부님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는 의식입니다. 뭐냐하면 지금까지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랐지만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싸우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거예요. 이 견진성사는 성령의 능력을 주입하는 것이죠. 신부님께서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주입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종부성사라는 것도 있습니다. 요즘은 이것을 종부성사라고 지칭하지 않고 병자성사라고 지칭을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신부님께서 오셔서 눈과 코와 귀와 손과 발에 기름을 부으시고 기도를 해주는 예식인데 이것은 일생토록 눈으로 지은 죄, 귀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손,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하는 예식이에요. 이렇게 기도하면 그 죄가 사해진다는 거예요.

가톨릭은 그 핵심이 성사제도에 있습니다. 죄의 용서에 있어요. 그리고 죄의 용서가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그런 특징이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교회 이론에 의하면 사제가 없으면 참된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사제를 통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18장 9절에서 14절 사이에 보면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그렇게 기도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사제에게 가라고 가르친 적이 없어요.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직접성의 종교라면 가톨릭은 간접성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의 용서를 받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종교임에 비해서, 가톨릭은 철저하게 사제들에 의해서 묶여져 있는 종교예요. 사제가 없으면 죄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가톨릭은 제사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가톨릭이 제사의 종교라는 뜻은 가톨릭은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미사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가톨릭은 원래 설교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 제사의 핵심은 뭔가 하면 죄의 용서에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의 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에요. 그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에 잘 참석하고 있다가도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에 어떻게 하다가 빠졌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미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그 순간입니다. 떡을 받아먹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죄용서가 그 때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미사를 드리는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죄의 용서에 있어요.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한 번 생각을 해 봐요. 가톨릭교회 성도들이 우리 개신교 성도들에 비해서 조금 개화가 덜 된 특징들이 있어요. 지나간 450년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 개신교 성도들이 대단히 진취적이고 개화된 정신, 앞서 나가는 정신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하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거예요. 루터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모든 평신도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마주쳐야 한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경을 직접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번역해서 평신도들에게 주었어요.

 

가톨릭교회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오랫동안 성경을 번역하는 성서공회를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서 성도들에게 가져다주는 성서공회가 성령의 기관이면 성령의 기관이지 어떻게 마귀들의 집단일 수 있겠어요. 그런데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어요.

 

이렇듯 가톨릭에선 일반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성경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최근에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서 성모 마리아 상이 울었다고 해서 순례객이 몰려들고 난리를 쳤어요.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고. 그 돌로 된 상이 울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에 울었겠습니까? 안 울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은 위험한 분들이에요. 앞으로 사이비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분들이에요. 그 돌이 어떻게 울어요.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연구해 보면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는 전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신이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도 종파별로 차이가 있는데 미신이 많은 종파일수록 조금 수준이 낮은 종파에요. 수준이 올라갈수록 미신이 줄어듭니다. 순례객들이 자꾸 몰려드니까 그 지역의 주교께서 "아무래도 확실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눈물을 수거해서 정식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올리브 계통의 야자 기름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누군가 밤에 와서 부어두고 간 거예요. 그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울었다"고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도 이 따위 이상한 미신이 있으면 빨리 척결을 해야 합니다. 이 가톨릭교회의 성도들이 왜 미신에 많이 빠지는가 그리고 왜 일반적으로 개화되지 못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첫째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1주일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 미사를 드리는 순간인데 여러분들 미사에 참석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앉았다 섰다 앉았다 섰다 이거 몇 번 하고 가서 떡 받아먹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개화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개화가 될 시간이 없어요. 요즘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강론한다고 해서 설교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 10분 정도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개신교회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고 성도들을 깨우치고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하고 그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 속에서 결단을 하고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개신교에서 배워간 거예요. 원래 가톨릭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가톨릭교회에 그 시간이 공식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근본적으로 제사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의 글은 http://www.churchnfaith.com에 사이비이단종교 항목에 가톨릭란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첨부파일: 소나무.ram(60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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