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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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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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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국 [jjkpaul] 쪽지 캡슐

2002-11-05 ㅣ No.42849

마산교구 시골에서 주임신부로 있는 6년차 아직은 어설픈 신부입니다.

11월 4일 서울 광화문 열린 공원에서 개최된 소파개정, 미선이 효선이 추모 행사에 다녀오면서 오고가는 길에 명동성당 뒷편 남산터널길을 지나가며 늘어서 있는 젼경대 버스들을 보았습니다. 병원노조 명동 농성 때문에 출동해있는 전경 수송차량들을 보면서

이곳 가톨릭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나름대로 읽어보고 몇자 적어봅니다.

 

먼저 명동성당 보건노조와 cmc 노조원들의 단식 농성장을 둘러보고 그들을 위로하지 못한점이 부끄럽습니다.

 

노조측의 잘못도 있습니다. 노조의 무례함과 지나친 강경노선, 일부 비신앙적 모습과 사측과 노측의 문제가 아닌 가톨릭과 노동자의 문제로 끌고가려는 점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노측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왜 다른 병원에서는 다 타결된 단체 협상이 유독 가톨릭계 병원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사측과 노측의 입장이 다 다르지만 합리적 대화와 타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감정적 싸움에 휩싸였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노조측에 서고 싶습니다. 월급이 많고 적은 것이 쟁점이 아니며, ILO나 국제 노동, 인권 단체  등에서 지적하듯 위헌시비까지 일고 있는 직권 중재를 핑계로 교섭을 게을리한 사측의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교황 회칙 등을 통해 드러나듯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 행동권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병원이 필수적 공익사업장으로 지정되어 노동조합과 조합원의 권리가 일부제한되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러한 제한은 최소한이어야합니다.

철도가 파업을 해도, 심지어 경찰이나 소방관이 파업을 해도 그로 인해 나는 불편을 겪지만 그들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유럽입니다,

병원노조가 파업을 하며 이로 인해 불편은 어느정도 생겼겠지만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의사들의 파업에는 그런 경우가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사회 윤리에 몇몇 원칙이 있습니다. 인격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공익성의 원리,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입니다.

병원파업이 공공의 이익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면 이는 공권력에 의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격이 침해받고 더 큰 개인이나 단체(노동조합 등)의 피해가 공공의 피해보다 커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병원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공익의 피해는 감수할 수 있는 정도라 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자는 분명 약자입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교회가 인정하고 장려하는 것은 노동자를 약자로, 그들을 사용자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울교구나 병원의 사용자측은 지나치게 편협된 자세로 조합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듯 합니다. 물론 노조측에 의해 피해를 입고 모욕을 당했다는 감정적 측면도 작용했다고 보지만 법적으로 불법이라 할지라도 대화의 창은  늘 열려있어야 합니다.

만약 가톨릭계 병원이 아니고 병원에서 쫒겨난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이 아닌 조계사를 택했다면 이곳의 많은 신자들과 서울대교구측이 이처럼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 비우호적자세를 견지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끊임없는 많은 단체들에 의한 명동성당에서의 농성과 시위 등으로 명동성당과 교우분들은 분명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해야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공권력을 피해 성당을 피신처로 삼고 있다는 것을.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단체나 노동조합, 학생들이 법집행을 피하기 위해 부당하게 성전을 더럽히고 전례를 방해하며 사제를 욕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교회를 피난처로 삼지않는 것입니다. 가봐야 소용없고 불러봐야 대답없고 손을 내밀어도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민중의 교회, 예수의 교회, 약한 이들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구가 다르기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하는 저의 나약함이 부끄럽고 사제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비행기나 기차타고 올라가면 못가는 곳도 아닌 명동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단식으로 쓰러져 신음하는 차수련 위원장과 노조 집행부 분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 사제라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정의를 외치고 소파개정을 외치고 반미,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면서도 양주잔을 즐겨찾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본당 예산 1년에 팔천만원, 주일 미사 참례수 300이 채 못되는 그나마도 농사짓는 분들, 시골을 지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다수인 이곳에서도 본당살림은 궁색해도 개인적인 생활에는 별반 어려움없이 지내는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더이상 빈말이 아닌 헛된 구호가 아닌 행동으로 민중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산교구 바오로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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