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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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주의단상(終)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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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화 [ppssm] 쪽지 캡슐

2001-11-10 ㅣ No.26223

聖職主義斷想(終)친구

 

R신부님은 추기경님과 동창 신부님이시다.

동성상업 동기동창으로 두 분 다 학생회 간부를 역임하신 것을 보면 어지간히 공부도 잘 하셨던 모양이다.

졸업하자마자 추기경님은 바로 신학교로 가셨고 R신부님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진학을 하셨다. 경성제국대학은 오늘날의 서울대학 전신이지만 조선 사람은 들어가기 힘든 대학이었다.

거기를 들어가신 것을 보면 수재였음이 틀림없다.

 

신부님은 뜻한 바 있어 학교에 다니시다 말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셨는데 그 프랑스에서 신학교를 나와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오셨다. 서품연도로 따지면 추기경님이 한참 선배이시다.

그런 이유로 해서 두 분 사이는 남다르다.

 

R신부님과 군밤

신부님과 밤늦게까지 일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새해예산을 짠다던가, 캠핑이나 체육대회같은 큰 행사를 앞에 놓고 숙의 하다보면 그 밤이 저절로 간다. 밤 12시가 지나 새벽으로 치닫게 되면 신부님은 반드시 해장국 한 그릇 먹고 하자고 제의하신다.

해장국을 먹고 돌아오다 보면 신부님이 꼭 들르시는 데가 있다. 군밤 장수나 군고구마 장수다. 그리고 두어 봉지 사서 우리들에게 주신다. 처음에는 신부님이 잡수시거나, 우리 집 애들 갖다주라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할수록 이상해서 신부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야! 이 추위에 얼마나 불쌍하냐? 팔면 얼마나 팔고, 남으면 얼마나 남겠니? 그냥 팔아주는 거야"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눈시울만 촉촉히 젖어들었다.

 

성직과 파탈

우리 성당 큰 일결이 있으면 으레 추기경님이 오셨다.

동창신부님이란 인연으로 다른 보좌 주교님들을 보내지 않고 직접 오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R신부님도 은근히 추기경님이 오시길 바라는 눈치였다.

사목방문이나 견진(주로 견진)이 끝나고 나면 저녁 식사를 하시게 되고 이 때 반주는 필수적이다. 원래 추기경님은 약주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셨지만 이 때만은 두어 잔(소주) 받으신다. 그러다가 취흥이 도도해지면 두 분은 주교와 신부사이가 아니고 옛 동성학교 시절로 돌아가 친구 사이가 되신다. 어깨동무도 하시고, 뽀뽀도 하시고, 가끔은 동요도 부르신다.

옆에서 시중들던 우리들은 박수로 환호의 응답을 해드린다.

 

저녁이 끝나고 추기경님이 가시게 되면 두 분의 사이는 다시 원상복귀된다.

주교님에 대한 신부님의 인사가 깍듯이 이루어진다, 정말 보기에 너무 좋았다.

이런 때 두 분 사이는 성직주의 냄새는 커녕 어린이 같고, 친구같고, 성자다워 보였다.

 

한 번은 추기경님이 문까지 나가시다 말고 차를 세우시더니 내리셨다.

그리고 흰 봉투를 하나 주셨다.

"추기경님 이게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

 

"이거 신부님 군밤 살 때 보태드려,

돈도 없으면서 맨날 군밤만 산다면서"……

 

군고구마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하는 계절이 왔다.

군고구마에 얽힌 사연이 그리워 이 글을 마지막으로  올려본다.

 

※맺음 말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나를 성원해 주셨던 분들.

나를 질책해 주셨던 분들.

나에게 인신공격을 하신 분들.

모두, 모두

친구로 남기를 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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