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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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의 어느 여름날 오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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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peterpan65] 쪽지 캡슐

2003-07-21 ㅣ No.55050

 

 내가 살고 있는 집엔 마당이라고 하기엔 낯 간지러운...그러나 아니라고 하기엔 사실인걸 어쩌랴 싶은 아주 작은 화단이 있다.

 

말이 화단이지 이름모를 잡초만 무성히 자라 있는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화단이다.

 

이곳은 내가 집에서 한병, 두병 먹다 남은 빈 맥주병이 쌓이면서 화단인지 맥주병 창고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좀 지저분히 그렇게 관리가 허술히 되고 있다.

 

가끔 수퍼로 가져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빈병값을 받아보고자 했지만 지금껏 작게 갖다주던 많이 갖다주던 껌 한통 이외엔 어떤 보상도 받아 본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값을 왜이리 쳐 주었나 하고 따져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마당에 쌓여가는 빈병을 치웠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기 때문이다.

 

몇달전 이었다.

 

대문이 고장나서 제대로 잠기지 않아 활짝 열어놓기엔 불안하고 그래서 지그시 닫아만 놓은 상태로 있은적이 있었다.

 

어느날 그 화단에 수북히 쌓여있던 빈 맥주병이 깔끔이 없어진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참 잘했다며 내심 좋아 했지만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그리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것 같았다.

 

청소하기 골치 아픈 병을 치워 간것은 참 잘한 일이지만 우리가 없을때 누군가가 들어와서 어쨌든 우리의 물건을 가져 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찜찜한 마음이 들어 차일피일 미루던 대문을 기술자를 불러 당장 고쳐 버렸다.

 

그후로 또다시 맥주병이 쌓이기 시작했다.(도대체 얼마나 마셔대냐고 묻지 마시라.)

 

수퍼로 가져가 비록 껌 한통이지만 바꿔 먹어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그거 광주리에 담아서 두어번 운반하는것도 요즘 같은 찜통 더위에는 곤혹 스러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그때 맥주병을 가져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며 내게 귀뜸을 해주었다.

 

동네에 아주 연로하신 할머니가 한분 사시는데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허름한 집에서 연탄불 때우며 사시는데 생활비 조달은 하루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물들을 수거해서 하루하루 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당장 그 할머니 잡아 대령하라고 시켰지만(?) 동네에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통에 만나기가 청와대 어른 만나는 것 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떨어댄다.

 

그럼 말아라! 하고 내 일 아닌것 처럼 그렇게 그일은 내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이번 휴일날, 이게 얼마만이냐?... 세상 시름 다 잊고 그저 벌러덩 누워 달콤한 낮잠에 빠져 홍야홍야 하고 있는 나를 아내가 억지로 흔들어 깨운다.

 

무엇을 사러 가는데 무거우니 같이 가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순간 만큼은 아내가 있다는게 무지 싫다.

 

복날 개 끌려 나오듯 싫은 발걸음으로 아내에게 이끌려 나와,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무거운 비닐 보따리 한아름 지고 낑낑 거리며 집으로 향하면서 가자마자 또다시 아까 끊어 먹었던 낮잠을 마저 마무리 하리라! 마음 먹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발자욱 앞서가던 아내가 "어? 저 할머니다!" 하며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키는데 아주 초라해 보이는 웬 할머니가 자그마한 손수레에 종이 박스등을 잔뜩 싣고 휘어진 허리가 딱 [ㄱ]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내가 후다닥 달려 가더니 "저어~할머니 맥주병 필요하지 않아요?" 하고 말을 건네자 마자 할머니 눈을 휘둥그레 뜨시며 "어디?"하며 소리를 지르시는데 그 반응 시간이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누렇게 썩은 이가 두서너개만 달랑 달려 있으신...솔직히 꽤재재해 보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 할머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듯 싶은데...맥주병 얘기가 떨어지자 마자 마치 "심봤다!!!"하는 표정으로 그것이 어디 있냐고 우리를 닥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를 따라오라며 앞서 가기 시작했다.

 

잘됐다. 마당에 쌓여있는 병을 치울 기회다! 하며 좋아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자 할머니는 안보이고 아내만 쫄쫄 따라오는게 아닌가?

 

아내는 의아해 하는 내게 미안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 할머니 걸음도 편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이 무거운것을 할머니가 어찌 가져 가겠냐며 우리가 갖다주마 약속을 하고 아까 만났던 자리에서 기다리게 했다고...

 

순간 나는 짜증도 났다.

 

이 무거운것을 나보고 들고 또 거기까지 가라고???

 

하지만 할수 없었다.

 

큰 광주리를 갖고 나와 그 빈병들을 담고 또다시 낑낑 거리며 아까 그 할머니를 만났던 곳으로 나를 수밖에...

 

수퍼 주인 아저씨가 나의 모습을 보고 빈병을 들고 왜? 자기네 가게로 안오고 딴곳으로 가나?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힘들게 할머니가 계신 곳에 도착하자 할머니 얼마나 좋은지 그 맥주병들을 보자마자 함박 웃음에 박수를 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지금껏 껌 한통 값의 빈병 들이었지만 할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박수를 멈추지 않는다.

 

그럼 병을 여기다 놓고 빈 광주리만 들고 가겠노라고 하자 아내가 내 옆구리를 꾹 찌른다.

 

그러면서 할머니에게 하는 말 "할머니! 댁이 어디세요? 이거 저희가 거기까지 운반해 드릴게요."

 

"헉!!!!"(난 그 말 듣자마자 냅따 도망가려 했었다.)

 

날은 후텁지근 하지 땀으로 온몸은 끈적거리지 힘은 들지 낮잠도 자야지...

 

그러나 어느새 나는 끙끙 거리며 그 빈병들을 들고 할머니를 뒤따라 가고 있었다.

 

걸음이나 빨리 걷든가...끙끙!

 

우리 동네에 이런곳도 있었던가??? 허름한 집 몇채 모여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막다른 허름한 집 앞에 할머니 걸음은 멈추었다.

 

집앞에 여기저기서 모아온 종이 박스며 고물등이 쌓여 있었고 비에 맞을새라 검은 비닐이 둘러져 있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해댄다.

 

나는 병들을 주욱 나열해 쌓아 놓고 빈 광주리를 들었다.

 

할머니는 마치 부처에게 인사하듯 두손을 합장하고 직각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고맙다고 하신다.

 

그러는새에 아내는 천원짜리 뭉치를 꼬깃꼬깃 접어 할머니 손에 쥐어 넣어준다.

 

아까 내 담배값 2,000원만 달라고 할때는 천원짜리 없다며 딱 잡아떼더니 저 천원짜리 뭉치는 또 뭐란 말인가?

 

할머니에게 앞으로 맥주병 나오면 이리로 갖고 오겠노라고 아내가 약속을 해댄다.

 

내 의향은 아예 처음부터 무시다...

 

그저 난 짐이나 부리는 머슴이라고나 할까?

 

고마워 자꾸 인사하시는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착하다며 내 엉덩이를 토닥댄다.(까불단 맞는다.)

 

이따가 시원한 맥주 사줄까? 하며 약 올린다.

 

나 인제 집에서 맥주 안먹을란다. 그거 빈병 모아서 들고 옮길 생각하면 안먹고 만다.

 

이렇게 힘든 휴일날 하오였지만 샤워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아~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난 요즘 행복을 이렇게 작은데서 얻는다.

 

그래도 좋다... 아니 그래도 좋다가 아니라 그래서 좋다가 맞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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