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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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명동성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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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안 [marcellyoo] 쪽지 캡슐

2002-11-11 ㅣ No.43314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에

나의 발걸음은 명동성당을 향하고 있었다.

명례방 언덕을 올라 마당에 서서 성당 건물을 바라 보았을 때

그건 내가 감히 범하지 못할 커다란 벽으로 느껴졌다.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

 

두리번 두리번~~~~

커다란 유리창 안에 책들이 많이 있는걸 보았다.

들어가 보았다.

책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

진열장 위에 놓여있는 ’매일미사’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미사라면?…  미사에 대해 무언가 쓰여 있겠지?

가격이 500원이었다.

나에겐 부담이 없었다.

책을 한 권 사서 나왔다.

7월이라 햇볕이 뜨거워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미사 통상문이라,,,,,’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사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미사가 끝났나 보다.

모두가 나가고 계속 사람들이 들어왔다.

잠시 후 또 미사가 시작되나 보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매일미사, 책을 펼치고 ’미사 통상문’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스피커에서 뭐라뭐라 하면 거기에 밑줄을 그었다.

옆 사람이 무어라 하면 또 거기에 밑줄을 그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나가서 바구니에 돈을 넣는다.

망설였다.

왜 돈을 넣지?

나는 책을 사고 차비 빼고 넣을 돈도 없었다.

한참 있다가 또 사람들이 줄지어 나가서 무언가를 받아 먹고 들어온다.

나는 당연히 안 나갔다.

돈을 안 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3번을 더 그렇게 일요일이면 갔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사무실에 갔다.

교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교리반은 이미 시작되었고 8월엔 없고 9월에나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8월 한 달을 혼자 또 그렇게 다녔다.

어떻게 다녔냐고요?

매일미사 책을 또 사서 밑줄 긋고,,,,

역시 낼 돈이 없어서 받아 먹을 것도 못 받아먹고,,,,

9월 첫 주 예비자 환영식에 칠순이 넘으신 아버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유치원을 다니는 큰애와 이제 칠개월 된 작은 아이를 데리고 갔다.

가방엔 성서 두 권(아버님 꺼와 우리 내외 꺼 그것도 구신약 합본,,,교리 시간에 한 번 들춰 봤다. 그래도 꼭 가지고 다녔다… 10개월을…), 노트 두 권, 성가책 두 권, 큰 애 볼 책, 작은 애 우유, 기저귀, 간식.

매 주일 12시 미사에 참례했고, 점심은 사 먹고, 성모동산이나 만남의 방, 또는 성당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오후 4시에 교리반에 들어갔다.

끝나고 집에 오면 저녁해서 먹기 바쁘고, 자기 전에는 묵주기도를 드렸다.(거의 졸면서,,,)

그렇게 10개월을 명례방 언덕을 올라 다녔다.

그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

 

그러나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례방 언덕을 올라가면 집이 하나 있다.

지금은 유리 집이지만 그 당시는 붉은 벽돌 집이 있었다.

안내의 집…

주일이면 봉사자(절대로 직원이 아님)들이 주보도 나누어주고 주차 관리도 한다(물론 평일은 직원이 한다).

토요일인지 주일인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데모대들이 들이 닥쳤다. 그것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게 들이 닥쳤다. 드디어 안내의 집 앞까지도 가득 메웠다. 트럭 한 대가 그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올라오고 있었다. 데모대들을 그 차에 길을 터 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머뭇머뭇 대답이 없다. "미사드리러 오셨나요?" "아니요, 길을 잘못 들었네요" "그럼 길이 복잡하니 마당에서 차를 돌려 내려 가시지요" 차단봉을 올렸다. 이때 "뚫렸다" "와~~~~"

차단봉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언덕 계단에서 대열을 짓던 사람들이 다 성당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후 더 들어 온 트럭들에서 짐을 다 내리고 마당 전체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하철 노조였다는 것을 다음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막을 치기위해 성당 벽에 못을 박는 것을 겨우겨우 설득하면서 막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오늘 오랬만에 명동성당을 찾았다.

우려했던 것보다 텐트들이 깨끗하였다.

언덕을 오르는 주계단에도 텐트가 치워져 있었다.

말이 많던 주차 텐트도 없다.

입구 우측에 있는 몸이 불편하신 형제님도 쫒겨 났던 자리에 다시 있었다. 물론 그 쪽으로 성당을 올라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실 그 형제님과 우리가족은 각별한 사이였다. 우리가족이 명동성당을 다닐 적에는… 지금도 만나면 너무도 반가운 인사를 나누지만…

………

 

 

해가 지고 어두운 성모동산 성모님 앞에 앉았다. 참으로 오랬만에 앉아보는 자리이다. 내가 힘들었을 때 가장 편하게 느껴지던 그 자리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역시 많은 분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돌아 간다. 소망과 기원을 담은 초 하나씩을 봉헌하고…

나도 조용히 성모님께 기도 드린다. ’성모님 여기 처음 찾아 왔을 때 애기들이었던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제법 컷습니다. 그런데 요즘 감기가 심하네요. 성모님 저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늘 보살펴 주세요.’

 

 

오늘 주차봉사를 마친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나누었다.

힘든 것이야 내가 겪어봤기에 위로 밖에 더 할 말이 있겠나.

마지막 그 친구와 주고 받은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 너 그 때, 어떻게든 그 트럭 막았어야 해."

" 아니야 나는 그 트럭이 돌려서 내려갈 줄 알았어."

………

 

 

나에게 명동성당은 나의 신앙이 시작 된 곳이고, 내가 힘들 때 조용히 찾아가고픈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지친 영혼을 위로 받고 싶은 곳이다. 아마 내가 이 삶이 끝나는 그 때까지라도 명동성당은 나의 신앙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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