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김웅렬 신부님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08 ㅣ No.171324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성경 공부 참 오래간만이죠?

지난주에는 피정 강론 두 번에 나누어서 나갔고,

또 지난 금요일에는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요셉을 비교해 보시라는 의미로 요셉 대축일 강론을 올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 1, 2, 3편까지 했는데 다 까먹으셨어도 괜찮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면 물이 다 밑으로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라지 않습니까?

오늘부터는 이제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 성경에 아주 중요한 것을 좀 짚고 넘어가야 하기에,

앞에 얘기했던 요셉 이야기 1, 2, 3편을 한번 다시 읽어 보시고,

또 지난 금요일 얘기했던 예수님의 양부 요셉 성인의 싸움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율법과 십계명’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몇 번에 나눠서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강의까지 들으신 분 중에는 ‘구약 성경에는 이야깃거리만 기록되어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 등, 전부 ‘OOO 이야기’로 제목으로 붙였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이 좀 더 구약성서에 좀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이야기식으로 이제 풀어나갔습니다.

오늘부터 하는 이 성경 강의는 ‘이야기’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오늘부터는 구약 전체에 대해서 좀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경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구별이 되어 있죠.

구약은 46신약은 27권 합해서 73입니다.

개신교는 구약이 우리보다 적습니다. 개신교에서는 39권만 인정합니다.

개신교에서 얘기하는 성서는 신약 구약 합쳐서 66권이죠. 우리는 73권

그래서 우리는 농담조로 하느님 나라 전화번호는 73국 4627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에서 개신교 쪽에서는 외경이라 부르는 것을 우리들은 성경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46권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는 얘기’와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대망하고 있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 27권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 된 책입니다.

또 구약은 하느님의 옛 계약의 서적이고 신약은 새로운 계약의 서적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중요한 ‘십계명’도 나오죠.

구약을 학자마다 분류하는데, 역사서, 시편, 예언서로 삼분하기도 하고, 혹은 역사, 법률, 시편, 예언으로 사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약성서는 단순히 풍부한 이야깃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십계’라고 하는 영화 기억나십니까?

56년에 나왔던 영화니, 70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이 영화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봤던 것 같아요.

그때 집에 흑백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텔레비전이 많지 않았었죠.

그래서 박치기왕 나오면 TV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는 제가 입장료로 딱지를 받고 들여보내 준 기억도 납니다.

아무튼 56년도에 찰턴 헤스턴, 당대 남자를 대표하던 율 브리너,

그리고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곱게 생긴 여배우(앤 백스터)가 출연했었죠.

4번 정도 본 것 같은데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명작 중의 명장이죠.

 

영화 ‘십계’는 성격 출애굽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요셉은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신임받으며 훌륭한 정치를 했지만,

그 요셉도 또 요셉 시대에 동시대의 사람들도 다 죽어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에는 죽어갑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살았던 사제라도 촛불 꺼지듯 한 날을 한 번은 맞이하게 될 겁니다.

4명의 신학교 동창 중 오늘 병원에 누워있는 동창을 만나고 차 타고 오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으로 떠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셉의 사후, 요셉의 동족 이스라엘 민족의 자손이 이집트 땅에 넘치고 넘쳐났습니다.

출애굽기에 1장부터 그 얘기가 나오죠.

이렇게 이집트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집트는 위협을 느낍니다.

이것은 당연하죠.

지금 한국에도 정말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있는데 그분들이 아니면 일이 되질 않습니다.

현재 400만 명이라는데 상당히 많은 것이고, 초등학교에도 다문화가정 아이가 많다 합니다.

이집트 사람들도 위협을 느꼈겠죠, 불안했겠죠. 너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들이 필요하면서도 또한 두려워하고, 좀 걱정스럽게 외국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집트에는 요셉의 이름을 모르는 새로운 왕들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요셉이 좋은 정치를 했었어도 세월이 흐르면 잊히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집트 왕은 번성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죠.

하느님에게 힘을 얻은 모세는 동포를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합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들 아십니까?

놀랍게도 200만 명을 넘는 대이동입니다.

한 가족이 이국에 옮기는 것도 큰일이죠.

하물며 200만 명이 넘는 민족이 일시에 이집트 땅을 빠져나오는 대역사입니다.

이집트 땅을 빠져나오는 이 모습은 소설가도 도저히 묘사해 낼 수 없는 장대한 드라마입니다.

내용은 너무나 극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유명하기에 여기에 대한 해설은 제가 양보합니다.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1장부터, 이집트를 빠져나가는 그 과정을 쭉 읽어 보세요.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재미있는 내용들을 연극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민족의 이동 배후에서 활약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깊이 깨닫고 알아내야 할 겁니다.

 

지도자였던 모세는 어마어마한 민족을 이끌고 광야에 이릅니다.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을 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붉은 화염이 돌에 문자를 새겨 나갑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시죠?

붉은 불꽃이 돌에다 문자를 새겨가면서 십계명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과연 내 가슴에 하느님의 말씀이 이같이 새겨져 있을까?

새겨져 있다면 내 가슴속에 하느님이 새겨놓으신 말은 대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성경을 읽거나 아니면 강론을 들을 때 그것이 불덩어리가 되어 내 안에 들어와

내 가슴에 마치 돌을 새겨놓듯이 그런 적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성경의 십계명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길지 않기 때문에 한번 좀 옮겨보겠습니다.

탈출기 20장 1절에서 17절이죠.

우리는 1계명, 2계명 이렇게 번호를 매기지만 성경에는 번호 매기는 것은 없습니다.

20장 1절에 1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2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이 ‘3대까지 갚는다.’라는 앞으로 또 좀 제가 하고 싶은 얘기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덕에 유대인들이 복을 받는 거와 같았다는 얘기겠죠.

그래서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 뿐이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보지도 못할 100년, 200년 후의 내 후손들에게도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영향이 내려간다는 뜻일 겁니다.

3계명은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계명은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6계명은 ‘살인하지 못한다.’

7계명은 ‘간음하지 못한다.’

8계명은 ‘도둑질하지 못한다.’

9계명은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 한다.’

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이상의 10가지 계명이 십계명입니다.

 

제가 구약성서를 처음 읽었던 것이 중학생 때라고 그랬었습니다.

근데 처음 읽었을 때 3계명을 읽으면서 아무튼 혼자 좀 웃었어요.

왜냐하면 3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사람을 쉬게 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하물며 가축까지 쉬게 하라는 말을 듣고 좀 웃음이 났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가축에게 휴일을 주는 것까지 규정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제가 젊은 신부 시절에는 대개 시골에서 사목을 많이 했죠.

그때 교우들을 보면 정말 철저하게 주일을 지켰던 것 같아요.

아무리 바빠도 주일에는 밭일하거나 논일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소라든지 이런 짐승들을 편안하게 하루를 쉬게 했던 것이

아주 그것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3계명에 보면 가축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심쿵합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짐승들도 당신이 만드신 짐승들도 아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5계명을 읽으면서도 조금 생각이 좀 많았습니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은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법률이죠. 헌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에 아무리 도덕심이 강조되어도 효성을 법으로 강요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며

조금 저항심을 가지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이것과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있어요.

사제 서품식 때 새 신부들에게 주교님이 묻죠.

‘본 주교에게 순명과 존경을 바치겠습니까?’

그거 들을 때마다 좀 저항감이 좀 듭니다.

왜냐면은 순명은 주교의 인격이 어떻든지 일단 가톨릭은 순명의 교회이기 때문에 바칠 수 있는데, 존경을 강제로 바치라고 해?

존경은 존경받을 만할 때 존경받을 만한 사람한테만 존경이 가는 거지,

이렇게 교회법 전례문 안에서 순명과 존경을 바치겠느냐고 묻다니.

처음 십계명을 읽었을 때도 부모에게 효도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헌법에 나와 있다니

아무리 이스라엘이 종교 국가라 하더라도 대단하다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십계명은 우리에게 큰 감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감탄이라는 말로서는 불충분하죠.

무엇인가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상이점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아서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나라 헌법이 어떻게 시작이 되는 줄 아십니까?

그냥 재미 삼아서 우리나라 헌법의 첫 장 서론부터 제10조까지와 비교하면서 십계명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 엄숙한 느낌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10가지의 표현은 비록 소박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실제자이시고 주권자가 되신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 무게와 힘을 어찌 헌법 헌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죠.

대단히 엄숙하고 무거운 십계명입니다.

우선 첫머리의 말씀, 20장 1절이 그거죠.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참 대단한 겁니다. 선언하시는 거죠? 선언.

참으로 엄숙한 선언입니다.

부부가 결혼할 때도 주례서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죠.

‘두 사람은 오늘부터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것도 얼마나 엄숙한 겁니까?

하물며 십계명은 하느님의 선언이 기초가 되어 결정되고, 이스라엘의 법률이 제정이 된 것입니다.

제가 피정 때 교우들에게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십계명은 단 두 마디로 요약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인간 상호 간의 존경이다.

하느님이 높은 하늘에만 계시고 알아서 찾아오라 하시면 찾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10가지의 길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느님을 찾아갈 수 있죠.

찾아갈 수 있는 능력과 또 이제 동기가 생겼다는 얘기죠.

 

이 십계명 전반 네 번째까지는 신에 대한 인간 본연의 자세를 명시한 겁니다.

어떻게 흠숭하고 살아야 하느냐?

제1계명은 뭐라고 그랬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 명쾌하고 하등의 설명이 불필요하지만, 무한히 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고 있지 않는가?

제가 우상에 대한 정의를 제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주 간단하죠.

하느님을 가리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우상이다.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우상이다.

여러분들이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없습니까?

있죠? 뭐? 자식이겠죠.

또 건강, 돈, 명예, 자기의 지식, 또 직장, 남편, 아내 등.

무엇보다도 자기를 하느님보다 더 높이는 마음들, 이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겠죠.

모세 시대 때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겼지만, 현대의 우상은 그렇게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상 숭배하는 것조차도 모르고 우상숭배하고 살아갑니다.

자매들한테 첫 자리에 있는 거 뭐냐 물으면, 솔직히 자식이 많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언제 첫째 자리에 올라가냐고 물어보면, 급할 때, 죽을 지경이 되어 있을 때,

절벽 끝에 몰렸을 때, 계곡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래요.

이럴 때는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놓고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조금만 거들어 달라고 그러죠.

‘그러면 제가 뭐 뭐 뭐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은 하는데, 일이 해결되고 약속을 지키느냐?

다 때가 돼서 해결된 거고, 애초부터 해결될 일이었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약속하고도 안 지키고 살아가는 게 많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할 때도 많고요.

하느님의 눈보다는 세상의 눈을 두려워한 적도 많았을 거고요.

이렇게 생각할 때 이 계명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시간은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시간에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오늘내일하는 신부님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입니다.

여러분들, 선종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하느님께서 편안하게 불러달라고 기도해 주시고,

다시 살려주실 거면 치유의 힘을 좀 보여주십사 하고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동창 모습을 보고 오니까 저도 마음이 좀 찹찹하고 좀 편치 않습니다.

저도 분심 들지 않게끔 저를 위해서도 화살기도 한번 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44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