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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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싹 -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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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2-03-29 ㅣ No.31510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 그리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사람들입니다(요한 19,25). 이들은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힘이나 세력, 지위가 있던 이들도 아니고, 남달리 목소리가 컸던 이들도 아닙니다. 더구나 여인들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사람취급도 제대로 못 받는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겉으로 내세울 번듯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충실히 따르면서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이들이 도처에 숨어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듯하지만 묵묵히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요? 성서에서 그 답을 얻습니다.

 

  일찍이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창세 18,3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갈수록 인성(人性)은 황폐해지고 패륜과 부조리가 판을 치지만, 그래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의인 열 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이 죄악에 찌들은 것 같지만 그래도 유지되는 것은 도처에 숨어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묵묵히 해 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행히도 주위를 살피면 그래도 우리 사회에는 착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어둡고 부정적인 요소가 적지 않고, 그래서 어떤 분들은 교회가 곧 망할지도 모르니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강하게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의 메시지’로만 교회가 크게 달라질까요?

 

  세상과 교회의 어두움과 악을 지적하고 투쟁하는 이들이 많다고 해서 세상과 교회가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썩은 살을 도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서 새살이 돋아나도록 돌보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낡은 세상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되는 교회가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변화되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어두움을 탓하고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약하지만 스스로 어두움을 비추는 작은 촛불이라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하였던 이들, 작은 이들이지만, 이들이 바로 세상을 비추는 작은 빛이었습니다. 성 금요일의 수난 복음은 우리 각자가 십자가 아래 서 있던 사람들처럼 세상을 비추는 작은 빛, 작은 희망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다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작은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닐런지요?

 

" 어느 날 볼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갔는데 큰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서지는 소리도 나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얼른 뛰어가서 사람들을 헤치고 들여다보았다. 단속반원들이 샌드위치를 파는 작은 포장마차를 뒤집어엎고 있었다. 계란이 깨지고 베지밀 병이 길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처음엔 사정도 하고 울부짖으며 매달려보던 포장마차 아저씨는 모두 포기했는지 그저 멍한 표정으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그만 괴롭혀요!" 갑자기 큰소리에 놀랐는지 단속반 아저씨들의 손길이 좀 멈칫했다. 그때, 말쑥한 차림의 아저씨가 걸어나오더니 길바닥에 뒹굴던 베지밀 세 병을 주어들고 멍하니 서 있던 주인 아저씨의 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밀어 넣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리쳤던 아주머니가 우유를 집어들고 주인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했다. 이번에는 아기를 업은 젊은 아줌마가 삶은 계란 몇 개를 줍고 돈을 냈다. 이 후에는 줄을 지어서 사기 시작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아저씨의 어깨를 한참 두드려주다 가시기도 했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생활성서 2002년 1월호 별책부록 <소금항아리>에서)

 

 제도 개혁이나 개선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 현장에서 힘들어 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따뜻하게 돌보는 손길도 있어야 합니다. 구조적인 부조리를 청산하자는 ’해방 신학’의 힘찬 목소리는 필요하지만, 굶주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묵묵히 돌보는 마더 데레사의 따뜻한 손길도 필요합니다. 이런 손길이 있을 때 우리 사회나 교회는 어두움과 약함, 부조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기득권자, 정치가, 성직자)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따지고 들지만 말고, 희망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하지만 말고, 작더라도 내가 희망의 싹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하느님 앞에 더 갚지고 소중한 행동이 되지 않을까요?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나의 행동, 우리 행동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신데,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쯤이냐 문제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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