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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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키워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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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6-03 ㅣ No.34588

제 본명은 베로니카입니다.

하지만 이 본명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마음대로 골라잡으셔서(?) 붙여주신 본명이죠.

 

어렸을 때부터 전 제 본명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베로니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촌스러워..

로즈마리나 세실리아, 스텔라, 에스텔, 세레나... 이런 본명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랬습니다.

로즈마리인 제 친구는 본명을 줄여서 ’로즈’라고 부릅니다.

세실리아인 제 후배는 애칭으로 ’세실’이라고 부르구요.

스텔라는 ’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죠..

근데 전 주위 사람들이 제 본명을 줄여 ’베로’라고 부릅니다.

베로야.. 베로야.. 정말 멋대가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죠.

 

본명을 영문표기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나는 앤, 마리아는 메리, 엘리사벳은 엘리자베스, 카타리나는 캐더린..

정말 우아하게 영어로 발음할 수 있는 본명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언젠가 영어사전을 뒤적여봤죠.

그랬더니..

베로니카의 영어 발음은.. 비러~~니커.

비러니커?? 이런 빌어먹을..

 

게다가 제 축일은 제 생일과도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제 생일은 4월인데 제 축일은 7월이거든요..

혹시나 해서 저희 엄마께 여쭤봤습니다.

무슨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나.. 해서요..

그랬더니 저희 어머니는..

아주 무심하게 대답하시더군요.

네 본명?? 글쎄.. 왜 베로니카로 했더라.. 누가 그걸로 하라고 해서 그냥 지었는데.. 하도 옛날 일이라서 잘 모르겠다..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지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이름 지을 때도 심사숙고하는 법인데..

하물며 딸이 평생 불리워질 본명인데..

그냥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아무렇게나 그렇게 짓다니..

난 우리 엄마 딸 맞나.. 싶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제 본명은 여러가지 일로 인해 수난을 겪습니다.

먼저..

지하철 화장실 화장지 자판기에서 파는 싸구려 저급 화장지 이름이 ’베로니카’입니다.

대체 베로니카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다른 것도 아닌 200원짜리 화장지 이름이 베로니카람.. 그것도 질이나 좋은 화장지면 몰라..

 

그리고..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영화 중에는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덕분에 제 마음 고생은 말도 못 합니다.

하도 놀림을 받아서 신물이 날 지경이거든요.

아직까지도 평균 월 1회 정도는 그런 놀림을 받죠..

 

최근에 나온 영화를 보면..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으로만 보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여기서 주인공인 베로니카의 직업은.. 고급 창녀입니다.

정말 김새는 일이 아닐 수 없죠.

 

그 뿐 아닙니다.

어지간한 본명은 교회 달력에 축일이 명기되지만..

전 성서인물이라는 이유로 달력에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스스로 떠벌리지 않으면 축일도 못 챙겨 먹습니다.

 

그래서 언제였던가..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전 제 본명을 갈아치울 생각을 했었습니다.

견진 때는 본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 생일에 맞춰 ’아나스타시아’로 하던지.. 아니면 다른 근사한 본명으로 바꿔야지 생각했지요.

 

근데.. 주위에서 너무나 반대를 하더군요.

저한테는 베로니카라는 본명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는 겁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왜? 라고 묻는 제게..

사람들은 분명한 이유를 대지는 못했지만..

너무 오래 돼서인지 몰라도.. 그냥 그게 친근하다고..

심지어 제 친구는.. 네가 다른 본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생소하고 이상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개명할 기회를 한번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 개명을 하려면.. 수도원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겠지요.

수도명은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죠.

어떤 부유한 사람이 으리으리한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해 정원을 가꾸는 일이 삶의 낙이었는데..

어느 날 그 정원에 민들레 홀씨가 날아와 싹을 틔우게 됐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한 두 포기씩 뽑아버리곤 했는데..

어느 순간엔가 그 민들레들이 점차로 번져 정원을 메웠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약도 뿌려보고 사람을 사서 죄다 뽑아보기도 하고..

그 민들레를 없애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요.

그런데도 그 민들레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원을 가꾸는 전문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 정원이 민들레 때문에 망쳐지고 있다.. 이 민들레를 없앨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

그랬더니 며칠 후에..

기다리던 회신이 왔다고 합니다.

그 회신 내용은...

다른 방법을 쓰실 게 아니라.... 그 민들레를 사랑해보도록 노력하십시오..

 

하긴.. 이 이야기와 저와 경우는 다르겠죠.

베로니카라는 제 본명이 제 마음의 정원을 망치는 잡초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전 그 이야기를 듣고 제 본명을 생각했습니다.

민들레 역시 하느님께서 피우신 꽃이잖아요.

꽃의 빛깔과 모양이 다소 마음에 안 들더라도..

사랑하는 눈으로 보면.. 나름대로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겸손한 자태가 더 없이 예쁘게 보일 수 있을테니까요.

이젠 저도 제 세례명을 마음껏 사랑하고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

 

 

살다보면..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일들이 많지요.

이런 일은 성당 안의 단체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저 역시 성당 안의 단체에 오래 머물다 보니..

어떤 사람이 미워서 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정말 눈에 가시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 정말 더 바랄 나위가 없을텐데..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내가 나가던지 해야지, 원..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지. 내가 자기한테 어떻게 했다고..

 

하지만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눈 딱 감고.. 저 사람을 무조건 이해하고 사랑해 봐야겠다..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이해해보자.. 그래도 밉살스럽고 못마땅하면.. 그 때는 이 단체에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자.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속없이 웃고 무슨 짓을 해도 넘어가고.. 한동안 그랬죠.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넌 밸도 없냐? 이런 핀잔도 받았지만..

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입이 없어서 말을 안 하는 게 아니야. 지금은 테스트 기간일 뿐이지. 당분간만 참아보고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한번 확 뒤집어 놓고 박차고 나갈 거라니까.. 나갈 때는 나가더라도 그래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하지..

 

그렇게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근데 정말 신기한 것은..

제 마음에 조그만 변화가 일어나더군요.

예전 같으면 거품을 물고 흥분할 일에도..

에그.. 같은 말이라도 꼭 왜 저렇게 할꼬.. 조금만 생각해서 말하면 저런 미움은 받지 않을텐데... 이런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도 본심은 저게 아닐텐데.. 하는 생각에 조금씩 두둔하게도 되고..

아직까지도 그 사람 때문에 물먹을 때가 종종 있지만.. 그런 것들도 예전처럼 그렇게 분하지만은 않구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 먹은지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사람과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아직도 가끔은 얄미울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그럴 때에도 그런 대로 잘 넘어가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마음이 편해서 좋습니다.

예전엔.. 개 꼬락서니 미워 낙지 산다고..

어떻게 하면 한번 더 골탕을 먹일까.. 이런 생각에 골몰하곤 했거든요.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고..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벌여 도리어 제가 당했던 적도 많았구요..

 

근데.. 지금은..

그런 소모적인 잔꾀 부릴 일이 없어서 편하고..

사람 미워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제가 그런 태도를 보이니 자연적으로 상대방도 한풀 꺽이더군요.

그래서 또 편하고..

 

결국 그 사람도 주님의 정원에 피어있는 ’민들레’였나 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주님께서는 그러시겠죠..?

그 사람이 ’민들레’면.. 너는 ’억새풀’이다.. 이 녀석아..

하긴.. 똥이 된장을 욕하는 셈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제 주위에 참으로 ’민들레’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면 또 다른 일이든.. 말이죠.

그 ’민들레’들을 사랑하려면..

앞으로도 전 너무도 치열하게..

무조건 이해하기, 눈감고 사랑하기, 그저 웃어 넘기기.. 이런 노력들을 해야할 겁니다..

하지만 해 볼만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미워해서 후회해 본 적은 있어도.. 사랑해서 후회해 본 적은 없는 것 같거든요.

 

어느 날.. 제 정원에 날아온 민들레 홀씨 하나가..

어쩌면 주님의 은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민들레를 사랑할 수 있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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