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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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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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2-15 ㅣ No.48224

어렸을 때 저는 참 작고 깡마른 아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일년 일찍 들어간데다가..

그나마 또래보다도 체격이 작았죠.

게다가 잔병치레는 어찌나 잦았는지..

철마다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무척 아파서 입학식이 지나고도 보름 정도 지난 후에 처음 학교에 갔습니다.

반 친구들이 저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로 크더군요.

 

방과 후에 아이들이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를 할 때..

전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집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숫기도 없었던 데다가 너무 작아 그 흔한 깍두기도 할 수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할 정도로 우울하고 외로운 어린 날이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왕따가 바로 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하지만 어린 시절을 그다지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저희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제가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용케 제 마음을 알아맞추셨습니다.

저를 감싸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늘 말씀하셨죠.

- 너는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아이란다..

 

아이들에게 가끔은 아무 이유없이 얻어맞기도 헀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억울해서 훌쩍거리며 돌아오면..

엄마는 제게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왜 울고 들어오는 거야. 물어뜯기라도 해야지.. 이런 말을 하실 법 한데도..

그냥 저를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죠.

- 너는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아이란다.

 

때로는 엄마의 말만으로는 위안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마치 선물과도 같이..

제가 각별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죠.

 

주말이면 아버지와 엄마는 저와 제 동생을 데리고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하곤 하셨습니다.

요즘 아이들.. 한번도 논두렁과 밭이랑을 본 적이 없다고도 하지요..?

쌀은 쌀나무에서 열리는 줄 안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자연을 생생하게 기억한답니다.

진흙탕에서 잰 걸음으로 꿀꿀대는 지저분한 돼지의 모습도 기억하고..

달려드는 파리가 귀찮아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누렁 소의 커다란 눈망울도 기억하고..

아무한테나 앞발을 치켜들고 좋아라 껑충 뛰며 달려드는, 맹하지만 순하기 그지없는 황구도 기억하고요.

 

그 뿐인가요..

울퉁불퉁한 흙길을 소달구지에 앉아 몸의 중심을 못 잡고 허둥댔던 기억도 나고..

거머리가 득실대는 미나리깡에 빠져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기억합니다.

들어서기만 해도 더운 기운이 훅 끼치는 비닐 하우스에서 발갛게 익어가던 토마토도 기억하고요.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꽃이 됐나 보다.. 생각했던 하얀색, 연보라색 도라지꽃도 기억하고..

네잎 클로버를 찾겠다고 바지에 풀물이 들도록 풀밭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따뜻한 봄에 엄마와 캐던 상긋한 쑥내는 또 어떻고요.

 

아버지와 엄마는 제게 이런 것들을 주님의 사랑이라고 보여주셨습니다.

제 손을 잡고 엄마는 나지막히 노래를 부르시곤 했는데..

그 때 엄마가 부르시던 노래 중에는 이런 성가도 있었답니다.

주님은 저 하늘 펼치시고 태양과 바다 꽃 만드셨네. 그러나 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과 사랑의 은혜...

 

가끔 부모님께선 발을 멈추시고 길가의 들꽃들을 보여주셨지요.

- 화분에 피어있는 장미가 더 예쁘니, 아니면 여기 이 꽃이 더 예쁘니?

이미 흥이 날대로 나서 엄마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고 대답할 준비가 돼 있던 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곤 했죠.

- 이 꽃이 더 예뻐!

- 거 봐라.. 작지만 더 예쁘잖아. 때로는 작은 것이 더 예쁠 때가 있단다..

 

아주 오랫동안..

전 제가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아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늘 제게 단호하고도 확고하게 말씀해주셨거든요.

심지어 저는 주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아이는 저 뿐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철이 들고서야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제가 애써 부인하려 해도 자연스레 인생이 제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더군요.

 

세월이 많이 지나..

이제 전 주님께서 저만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주님께선 저만큼 다른 사람도 많이 사랑하시더군요. ^^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저희 엄마죠.

아직까지도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시곤 하거든요.

- 주님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니? 넌 각별히 사랑받는 사람이야..

 

이젠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아서..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전 피식 웃으며 제법 능글맞게 받아치기도 합니다.

- 하이고~~ 쫌만 더 사랑하시면 큰일 나겠네.. 이젠 안 속네, 안 속아.

 

전 살아 오는 동안 어느 시험이고 한번에 붙어본 적이 없습니다.

될동 될동 하다가 꼭 마지막에 가서 목표했던 것을 놓쳐본 적도 부지기수지요.

워낙 우유부단하고 맺고 끊는 맛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먹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에도 바로 속아넘어가서 사기당하기 딱 알맞은 1순위라는 놀림도 자주 듣지요.

어설프고 어눌하다는 말도 많이 듣고요.

무엇보다 그다지 건강하지 못해서 아직까지도 늘 비실대고 골골댑니다.

 

하지만 저도 놀랄 정도로.. 실패할 때마다 또 다시 일어나 무언가를 시작하곤 하는데..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주위 사람들은 가끔 신기해하곤 합니다.

가장 약하고 온순하게 보이는 애가 가장 강하고 끈질기다고요.

 

아마 엄마는..

작고 허약한 딸 때문에 늘 마음을 졸이셨을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가 아니라 엄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그 말을 되풀이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엄마와 저를 살린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전 비록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지만..

저 역시 그 믿음에 전염이 됐거든요.

그 믿음 덕에 그래도 이제까지 잘 살았으니까요.

 

지금 이 시간 엄마는 철야기도회에 가 계시답니다.

아마 그곳에서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인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겠죠.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신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터무니없고 가당찮은, 만용에 교만으로 비쳐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고 바라는 무언가를 이룰 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만용과 교만을 가지고 살아볼까 합니다.

제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는 그 날..

만용과 교만으로 메워진 그 자리를 겸손으로 채운다면..

지금 제 모습.. 능히 용서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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