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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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32번님..40대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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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29 ㅣ No.245

얼마전 가입을 해서 처음 이 곳을 들어 와 보게 되었습니다.  글의 길이로 보아도 얼마나 오랫동안 아픈마음으로  쓰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저는 46세의 주부입니다.  우선 232번님의 상황이 저의 결혼전 친정 분위기와 너무 비슷해서 제가 지나온 날들, 느꼈던 일들을 나누는게 도움이 될까해서요.  

 

저는 어려서는 친정아버지를 몹시 무서워했고 사춘기가 되어서는 지독히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늘 어머니에게 소리지르고 밥상을 뒤엎고 때리고 하는 것을 보며 자랐으니까요. 아버지한테서 떠나고 싶어서 빨리 결혼이 하고 싶었습니다.   어버지는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가기 전날 밤에도 어머니를 때렸고 (뚜드려 팼다고 하는게 났겠군요),  저는 한 숨도 못자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안대를 한 어머니와(눈이 퍼렇게 멍이 들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시험을 치러 간 기억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래도 합격을 했지만 저는 매일 매일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쌓으며 커갔고 사춘기를 그래서 몹시 앓았습니다.

 

 저의 집안은 친가, 외가 모두 천주교 집안이었고 아버지도 명색이 교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감탄할만큼 낙천적이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도 수 없이 엄마에게 이혼하라고 했습니다만, 그 연배되시는 분들에게 이혼은 형벌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스트레스로 매우 공격적 성격을 갖게 됐고 남자에 대한 무차별적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저의  남동생도 커 가며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했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다들 밖으로 돌았습니다.  집에서도 어머니와 웃음꽃을 피우다가도 아버지 들어오시는 소리만 나면 다들 자기 방으로 흩어져 방문 걸어잠그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지긋지긋했습니다.  232번님 동생분의 행동이 너무 너무 공감이 갑니다.  젊은 날의 나의 방황하고 괴로와 하는 모습같습니다.

 

저는 참 아버지 복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졸업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시아버지되는 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너무 오래도록 참고 참는 생활을 하셔서인지 말이 없고 사람들을 피하는 자폐증 증세를 보이시는 분이었습니다.  며느리와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려 합니다.  남편이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댁 형제들은 누구도 감히 시아버지의 권위에 맞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정에서는 친정어머니가 낙천적이고 적극적 성격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는데  시어머니는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하셨습니다.  시아버지는 이기적이고 차갑고 독선적성격입니다.  가족들이 모여도 일방적인 시아버지의 훈계와(언제나 돈을 아껴쓰라는)  지시사항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대화란 없습니다.  들어온 식구인 큰 며느리(저는 둘째 며느리입니다)는  최초로 시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이었고 큰 며느리가 들어 온 이후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편할 날이 없더니 지금은 분가해서 따로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다행히 성품이 착하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기가 죽어서인지 필요할 때도 자기 주장을 못해 답답하기는 합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저의 공격적 성격은 서서히 없어져 갔습니다.  결혼 초 저의 공격을 남편은 잘 받아 주었습니다.  스트레스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피폐하게 하는지요...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

사랑이란 것은 생명을 만들고 키운다는 것을 매일 매일 온 몸으로 느끼면서 비밀이 풀리듯 어머니를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친정 아버지, 시아버지 두 분 다  사람들을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사랑의 감정이 생기질 않는 것 같습니다.   필시 어렸을 때에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인정도 못 받고 사랑도 못 받고 치열한 다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젊은 시절 병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사법고시에 대한 꿈을 가정형편과 병으로 접어야 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친한 친구들이 검사, 변호사가 되는 것을 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마음이 병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포악하고 술만 마시고 놀러만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열등감, 좌절감, 알 수 없는 분노,  이런 것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시아버지도 너무 너무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 자수 성가한 분이었습니다.  학벌도 변변치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사 놓은 부동산이 올라 부자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니 사람들이 시아버지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돈은 시아버지께 신앙이었습니다.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 배달 한번 못 해본 유일한 집입니다.  가족 외식은 고사하고 환갑, 칠순도 두 며느리 손으로 집에서 치렀습니다.  시아버지는 참 차가운 성격입니다.  돈 안드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릅니다. 아니면 그런 표현을 하는 데 익숙치 않은 건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시어머니는 하도 음식을 아끼라는 시아버지 말씀에 대꼬치처럼 마르셨습니다.  160cm가 넘는 키에 겨우 40kg이시니까요.  

 

저는 두 분 어머니의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힘들었던 역사의 한 장을 가족을 부양하며 어쨌든 애써서 살아 오신 아버지들,  사랑도 인정도 못 받고 (자업 자득이지만) 자식들의 사랑도 존경도 못 받고 계신 아버지들을 이제는 이해하려 합니다.  

 

20대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30대에는 참으려면 참을 수도 있었지만 안 참았고, 40대가 되니 참고 싶어졌고,

이제는 참을 필요가 점점 없어짐을 느끼며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점점 잘 참는다고 제 자신이 기특했었는데,  그 분들의 살아 오신 생이 보이면서 (참 이상한 것은 40을 넘겨 제 자신 돌아 볼 세월이 쌓인 후에야 그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니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제는 그 것이 괴롭지 않습니다.  연민의 정이 생기면서 저 먼저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미움이 얼마나 negative한 힘을 지녔는지  연쇄적으로 얼마나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는지 저 자신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저의 친정 어머니, 지금은 정말 주님의 은혜안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평화로운 가운데 계십니다.  친정아버지도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천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열심한 신자는 아니라고 제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일도 잘 빼먹고...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이 평화로움, 모든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 희생을 기뻐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을 새로 배우게 되었고  얼마나 이 은혜가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갈등이 생기면 이제는 제가 저를 들여다 봅니다.  '네가 이렇게 괴롭구나,  이런 생각을 들고 이리로 뛰어 가는구나, 저리로 뛰어가는구나.  이리 저리 부딪히는구나.  이제 힘드니 내려 놓는구나...'

 

장황히 제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하는 책 제목도 있나 봅니다만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뇌하고 좌절하고 지독한 미움도 사랑도 할 수 있는 때가 젊은 날이 아니었나 합니다.  점점 깨우치고 알아가는 희열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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