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참담한 마음, 허나 희망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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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1-08-05 ㅣ No.23297

+ 찬미예수님

 

   김한수, 송영희, 박태교님께

 

   저는 서울 대교구 소속의 사제로서 대신학교에서 신학생들 양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네분 몬시뇰 중의 한분, 님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 신부님도 직접, 간접적으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 본당에서 특강도 했었고, 예전에 제 동창 신부가 그분 밑에서 보좌 생활을 했기에 다른 선배 신부님보다는 좀더 안면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안 신부님은 교구 중견 사제로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시면서 노력하시는 분으로 알아왔기에 님들의 그런 ’혹독한 평가’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님들에게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으로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 신부님에 대한 불만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 글을 올린 시각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 8월 4일 밤 11시 9분, 11시 15분, 11시 22분이었습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세분이 어쩌면 그렇게 동일한 내용의 글을 거의 동일한 시간에 올릴 수 있을까요? 조금 나쁘게 해석하면, 안 신부님께 불만을 갖은 분들이 단체로 행동을 했다고 추론할 수도 있지요. 또 8월 4일 토요일 밤 11시에 글을 쓴 것은 주말 밤이라서 교구청 전산실에서 감독이 허술한 시간이라는 점도 있지요. 주일에는 교구청 전산실이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 하필이면 그분이 임명된 7월 31일 직후가 아니라 며칠 늦은 8월 4일, 그것도 전산실이 근무하지 않는 주말의 늦은 밤에 글을 올렸을까요? 부디 저의 추론이 부질 없는 것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제라도 신자들 전체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평소의 저의 지론은 이렇습니다. 본당 신자의 3분의 1이 그 신부님을 칭찬하고, 또 3분의 1이 보통으로 생각하고, 나머지 3분의 1이 불만을 갖고 있는 정도면 괜찮다고요. 또 사제에게 불만을 갖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불만의 표출 방법은 공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불만의 표시는 당사자 신부님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쳐나가는 데에 목표를 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공정하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저는 님들의 방법이 공정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다고 봅니다.

 

 님들을 글을 보면 님들이 안 신부님께 불만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자들이 사제에게 불만 갖는 그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님들의 불만 표출 방법이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먼저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님들은 그 신부님께 개인적으로 불만을 말씀드렸나요? 이 기준은 저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정하신 기준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마태 18,15-17)

’너희 형제 중에서 잘못하는 사람이 있거든, 먼저 가서 일대일로 그 사람에게 가서 그것을 알려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 하나를 얻는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둘이나 셋이 가서 알려주어라. 그래도 안 돼거든 교회 공동체에 알려라. 그래도 안 듣거든 세리라 죄인으로 여겨라.’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게시판에 비난의 글을 올려 놓는다면, 당사자 신부님이 님들을 글을 읽고 과연 님들이 원하시는 대로 ’영성적으로 새로운 각오’(김한수님)를 갖고, "착한 목자, 대사제"(송영희님) 되도록 결심을 하실까요? 바꿔놓고 생각해보지요. 님들도 역시 사람이기에 잘못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님들의 잘못을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비난을 한다면, 설사 그 비난이 옳다고 해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님들의 불만 표출의 방식은 현명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이런식의 불만 표출은 기껏해서 그저 님이 화풀이 정도는 되겠지요. 화가 나면 화풀이를 어떻게든 해야 건강에도 좋지요. 하지만 님은 화풀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님의 글을 읽고 신부님에 대한 불신을 갖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만일 그 신부님이 님들의 가족, 혹은 오빠, 형님이라 할 때 그 본당 신자들이 님들처럼 행동했다면, 님들은 만족하시겠습니까?

 

  님들의 주장이 정말 사실에 입각하지도 의문입니다. 김 한수님은 안 신부님이 계시던 B.N본당 신자들의 ’말없는 무반응으로 이분에 대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지요. 저는 같은 교구이기에 안 신부님이 계시던 그 B.N 본당이 어딘지를 알고, 그래서 그 본당 자유 게시판에 들어가 봤습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몬시뇰에 비해서 축하의 글이 더 많이 올라왔더군요. 그 신부님이 B본당 이전에 계시던 Y 본당 신자분도 축하의 글을 남기셨고요. 또 그 신부님이 정말 교구에 "아부, 아니 재정 지원 등"을 통해서 몬시뇰 직책을 따 내셨는지 모른다(박태교님)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직 그 신부님과 주교님만이 아는 사항일텐데요.

 

  설사 님들의 말씀대로 안 신부님이 정말 그렇게 행동하셨다면, 많은 신자들을 죄 짓게 하는 분으로서 하느님 앞에 책임이 크지요. 하지만 만일 님들의 말이 진실에서 많이 어긋나서 다른 신자분들을 죄짓게 한다면 님들 역시 하느님 앞에 책임이 크다는 사실,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성서에 예수님께서, "형제를 죄짓게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닷물에 빠져 죽은 것이 낫다"(마태 18,5-7)고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2. 님들의 글을 읽고 저는 정말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 성직자 영입을 위해서 정 하상 성인이 그 먼 중국 땅을 고행을 무릅쓰고 수 차례 다녀올 정도로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이 컸는데, 어느 새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참담한 심정입니다. 저는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성직자를 아껴주고 염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은 우리 한국교회의 좋고 아름다운 전통이고 그것이 사제 성소 개발에 그리고 사제 생활하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강조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은 제가 10년간의 외국 유학 생활과 2년간의 한국에서의 본당 주임 신부 생활을 통해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점입니다. 물론 사제를 과잉 대우해서 나오는 부작용을 저는 잘 알고 있고 이는 분명히 고쳐져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제와 신자들 간의 따뜻하고 돈독한 관계마저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님들의 이런 식의 불만 표출은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에 건설적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3. 얼마전부터 본당에서 사제와 신자들간의 갈등과 불화가 있다는 얘기가 부쩍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랜 동안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어 오던 본당이 평신도들도 함께 참여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교회, 참다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좀 더 나은 교회로 탈바꿈하기 위한 진통이라고 할까요?

 

또 교회 내에 사제와 신자 간에, 그리고 신자와 신자간에 갈등과 불화가 있다는 그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도 갈등과 다툼은 있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간의 서열다툼(마태 20,20-24), 초대 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논쟁(갈라 2,11-14), 지역 교회 안에서의 분쟁(1 고린 1,10-17) 등을 생각해보면 그렇지요. 교회 안에 긴장과 갈등이 있다는 점은 사회의 여타 공동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달라야 하는 점은 그 긴장과 갈등을 복음적 방식으로 풀어나가느냐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즉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의 해결은 미움과 비방을 대동하는 편가름으로 한 편을 몰아내는 "세속적" 형태가 되서는 안되지요.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와 조정으로 같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복음적" 방식이 되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백성에 속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이고 한 가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긴장과 갈등 관계의 해결에 대한 제안을 해봅니다. 해결의 기준은 역시 복음 말씀에서 찾아야겠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마태오 복음 18,15-17을 기준으로 삼고자 합니다.

너희 형제 중에서 잘못하는 사람이 있거든, 먼저 가서 일대일로 그 사람에게 가서 그것을 알려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 하나를 얻는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둘이나 셋이 가서 알려주어라. 그래도 안 돼거는 교회 공동체에 알려라. 그래도 안 듣거든 세리라 죄인으로 여겨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론 사제에게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1) 본당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제가 있거든, 본인에게 우선 그 사실을 알려줍시다. 물론 신자가 신부님에게 그분의 잘못을 직접 알려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E-mail을 하고 있지요. 그것을 통해서 조리있게 얘기한다면 어떻까요? 컴맹인 신부님에게는 편지를 쓰면 어떻지요? 물론 전자 메일이나 편지를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셔서 조리 있게, 되도록 감정을 자제해 가면서 차분하게 쓰셔야겠지요. 좀 더 뱃짱이 있는 분은 전화로 혹은 만나서 직접 얘기하실 수도 있겠지요. (대다수 신부님들의 사목 경험을 보면, 대부분 정 반대더군요. 신자들은 다 알고 있는데, 본당 사제만 모르는 경우가 자주 있답니다).

 

  2) 일대일의 방식이 안 통하면 조용히 몇 사람이 신부님을 만나서 알려드리면 어떨런지요. 고발하는 식으로 말고요. 좀 차분하게.

 

  3) 이래도 저래도 안 되면 기도해드려야지요.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잘못하고도 고집부리는 사제, 그래서 정말 미운 사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기회에 다른 사제들, 특히 서품 받은지 얼마 안되는 사제들을 위한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을 하면서 완벽한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부닥치고 깍여가면서 조금씩 서서히 성숙한 부부가 되듯이, 신부님들도 그렇다고 봅니다. 서품 받으면서 완벽한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속에서 조금씩 깍이고 다듬어지고 보충되면서 성숙한 신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성숙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도 노력해야 하겠지만, 신자들의 현명한 처신과 기도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성숙한 신부님으로 자란다면, 그분을 통해서 성숙한 신자들이 많이 생기겠지요.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은 서로 도와주고 보충해주는 관계에 있습니다. 특히 새 신부님이라면 아직 가야할 길이 많고 깎여지고 보충되야 할 면이 많은 분입니다. 혹시 서툴고 모난 면이 있더라도 너무 못마땅하게만 생각마세요. 힘들더라도 그분이 생각하고 자신을 고쳐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립시다. 그분도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잘 살려고 매일 각오하고 기도하는 분 아닙니까?

 

  한 마디만 더 말씀드리면, 적지 않은 분들은 교회의 주인은 성직자가 아니라 신자라고 생각하시더군요. 글쎄요. 교회의 주인이 평신도인가요? 교회의 주인은 사제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제나 평신도는 그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건실하게 만드는 도구일뿐입니다. 서로 각지 다른 역할을 지닌 그리스도의 도구일뿐이지요. 마데 데레사의 말씀처럼,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 연필일 뿐입니다.

 

   성숙한 평신도는 사제와 힘겨루기를 하기보다는 사제가 자신의 소명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과 충고, 기도를 해주고, 또한 불평과 비난을 앞세우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서 충실히 해나가는 사람들이 아닐런지요. 성직자 중심주의는 성직자의 역할에만 너무 의존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잘못에 너무 매달려서 비난만 하고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하지 않고 간과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가 설사 부족하다고 해도 자식들이 잘 하면 그 가정이 잘 되어가듯이 교회 공동체도 그런 것 같더군요.

 

   글이 길어졌네요. 님들의 글을 읽고 슬프고 참담한 마음이 컸지만, 이런 기회에 우리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가 함께 따르고자 하는 주님을 좀더 잘 섬기자는 의도에서 썼습니다. 표현상 모나고 거친 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님들을 인신 공격하려는 마음은 결코 없다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님들의 영육간의 건강을 바랍니다.

 

 좋은 사제가 있는 곳에 좋은 신자가 자라나고, 좋은 신자가 있는 곳에서 좋은 사제가 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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