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부끄러운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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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02-04-19 ㅣ No.32179

자유게시판의 형제자매 여러분!

 

먼저 저의 신분을 밝혀드립니다.

저는 천주교의 한 사제입니다. 시골 성당의 책임자로 있는 사제입니다.  일컬어 ’본당 주임 신부’입니다. 나이는 50대 후반입니다.  사제생활 29년째입니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법랍(法臘) 43년입니다. 법랍 43이라는 얘기는, 제가 소신학교로부터,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출가’하여 대신학교와 군대생활까지 도합 15년 수습기간 지내서 사제수품 받고 사제 생활 29년째 살다보니 법랍 43년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법랍’을 들먹이면서 말씀드리는 까닭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제가 할 일을, 즉 소임을, 최선의 노력으로, 다시 말씀드려, 신명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즉 항상 자신(自信) 없는 삶을 살아왔음을 전제(前提)로 하고 말씀을 드리는데, 여기 자유게시판에 가끔 올라오는 형제자매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잘 봐 주세요!"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불쑥 주책 같은 말씀을 올리려고 이 글을 쓰는 심정을 너그럽게 봐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솔직히 말씀 드려볼까요!

저는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여기 본당에서 저의 임기까지 무사히 살게 되면 여기 신자 분들께서 아마 저의 환갑 잔치를 차려 주신다고 무슨 일을 벌릴 것을 강력 대처해야겠다고 내심 무장(?)할 각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 굿뉴스 자유게시판에 밝히는 이 심정이 사실은 무슨 제스처 같아서 ’위선자’가 아닌가 하는 양심의 가책을 솔직히 표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글을 쓰는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요! 우리 한국에서 지금 사제로서 봉직하고 있는 저의 모든 선배-동료-후배 사제들에 대한 무슨 비판(나쁜 뜻의 비판이 아니라 긍정적 의도의 비판 포함)을 들으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비판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판, 즉 critic은 항상 영원히 가치 있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허나! 허나! 정말 허나! 그것이 악의(惡意)의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악의(惡意)의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제가 강조하는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사제들 때문에 상처를 받으시는 신자 형제 자매님들 아주 많으십니다! 제가 죽어서 주님 대전에 섰을 때 아마 천당에 들어갈 판정을 받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정말 자신 없습니다. 왜냐면, 저 때문에 상처받으신 신자 분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걸 생각하면 아마 저는 지옥 갈 것 같습니다. 저 때문에 상처받으신 분들을 생각하면 저는 지옥 갈 것입니다. 이런 괴로운 생각 가운데 그래도 저는 상처받으신 분들을 위해서 자주 우리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지요!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실 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러면서 저 자신 솔직히 아무런 변명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우리 형제 자매님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그렇게 생겼다고 해서 실망하시지 마세요, 제발!" 이렇게 말입니다.

이즈음의 TIME지를 읽으신 분들은 미국이나 외국의 사제들 때문에 정말 심각하게 실망스런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 보도에 대하여 한국 언론매체도 간간이 보도를 했지요! 저는 그런 외국 동료 사제들에 대한 보도를 읽으면서 저의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외국의 일입니다만, 그렇다 해서 저를 포함한 한국의 사제들이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말씀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비슷한 부끄러움이 우리 한국에선들 사제들에게 자유롭지 않은 사실이거든요!

그러한 현실을 굳이 거부한다면 그 또한 현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꼴이지요! 허나, 까발려서 이로울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 상황 때문에 우리는 더욱 괴롭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왜 드리는지 잘 이해해주세요!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실망하지 맙시다!" 이겁니다.

항상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사실은, 사제들 중에는 그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요!

제가 저 자신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웃기는 얘깁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노력을 하며 삽니다. 그런 교만(?)으로 말씀드립니다. 오해하시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자면(모두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만, 한 가지 예입니다.), 이 자유게시판의 ’우리 신부님의 관심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올리신 분이 계시고, 그에 대하여(re로 글을 쓰셔서) ’본당 신부님의 관심사’라는 글을 쓰신 분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의 사제들에 대한 positive 또는 negative 관점을 떠나서 저는 ’사제들도 이렇게 저렇게 그 소임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이런 괴상한 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저의 말씀으로 둘러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사제에 대해서도 도식적으로 칼로 자르듯이 적용시킬 수 없는 현세(’현세’란 아직 완전 해명을 할 수 없는 차원이라는 뜻으로 일컬은 말)에 아직 갇혀 있는 존재라는 점을 전제하셔서,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관찰해 주시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상한(?) 변명이자 부끄러운 변명을 드립니다.

 

그 괴상한(?) 변명이자 부끄러운 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저 자신과 연관시켜 말씀드립니다.

저는 지금(금년 2002년도)에 저희 본당에서 월 생활비로 30만원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께서 저에게 질문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본당 자립이 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물론 자립 본당이지요!"하고 말입니다.

 

저 솔직히 말씀드려서 30만원으로 한 달 먹고 남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것이 저 잘났다고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런 말 하느냐고요?

저는 한 달에 30만원 가지고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성당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제가 본당 주임신부로서 30만원 이상 먹고 살 성당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면 저희 본당은 1년 예산 상 교무금과 주일 헌금 합쳐서 2천 2백 만원의 본당이거든요! 그렇지만, 신자 분들이 1주일에 한 번씩 성당과 사제관 청소도 해주시고 가끔씩 김치와 특별한 반찬과 그리고 쌀과 절기에 맞는 채소나 해산물을 갖다 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먹을 것이 항상 남아돕니다.

저의 이 본당은 그 예산 상 1년에 최소한 2천 만원 상당의 급료로 대우할 사무장이나 1천 5백 만원 상당의 식복사를 고용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틈틈이 서류 정리를 하고 제가 출장 갈 경우에 신자 분들이 번갈아 성당 지키면서 사무장 없는 갭을 메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매간 결단마라]라는 저의 우스개 옵션 제시의 표어대로 저의 먹고사는 일이 해결됩니다. [자]는 ’자취’, [매]는 ’매식’, [간]은 ’간식’, [결]은 ’결식’, [단]은 ’단식’, [마]는 ’마음으로’, [라]는 ’라면’이 그 항상 제시되는 옵션입니다만, 사실 그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것인지는 살아보면 다 아는 것입니다. 물론 불편하고 답답한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형편대로 살자! 이렇게 말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형편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성당에서는 주임 사제가 한 달에 수 백만 원을 소요하는 생활 패턴을 살아주어야 합니다. 어떤 성당에서는 50만원을 소요하는 생활 패턴을 살아야 하는 곳일 수 있습니다. 어떤 성당에서는 30만원으로 충분한 생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골프 치면서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해야만 그 분 스타일의 교분으로 사목과 전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골프를 치자고 해도 그걸 못하시는 신부님이실 수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음식을 아무 것이나 잡수실 수 없을 정도로 위장이 나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부님은 늘 채소만 즐겨 잡수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신부님은 과거에 근무하시던 소임 때문에 가끔 고급 손님이 많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부님은 성격상 사회적 활동을 잘 하시지 않고 성당의 판에 박힌 일만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의 스타일 따라 깨지는 경비의 차이가 대단할 수 있습니다.

 

형편대로 살자! 그렇다 해서 마구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호의호식하며 인생을 즐기자고 사제 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참으로 잘 못된 일이지요! 통탄할 일이지요! 그런 사제는 우리 교회의 불행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불행한 사제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시골 성당 사제는 시골 성당 수준으로, 대도시 성당 사제는 대도시 수준으로 라고 말입니다. 대도시의 잣대로 시골을 말하지 말고, 시골 수준으로 대도시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도층 인사들과 하층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지도층(부유층)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의 진정한 사제들은 모두 우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처지대로 적응하여 투신할 수 있는 복음적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감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매일 미사를 봉헌 할 양심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미사에 봉독하는 성서가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항상 같이 드려야 할 미사 경본의 기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주제로 하는 것인데,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면서 아무리 습관적이라 하더라도 거짓말로 기도문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사제도 양심이 있는 인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습니다. 사제들을 너무 불신하시지 마시라고 말입니다.

저는 아직 골프 칠 줄 모릅니다. 허지만, 제가 혹 대도시 본당의 사목자로 소임을 맡게 되어 골프 치는 신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게 된다면 골프 치러 다닐 수밖에 없을걸요!  그리고 지금 시골에서는 싼 음식점에서 사람들과 식사를 해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지만, 대도시 사목자라면 비싼 음식점에도 자주 가야 할 처지가 될걸요!

그래서 말하고 싶습니다. 사제들의 다양한 사목 현장의 상황을 이해하신다면 사제들의 모습을 처지대로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이라고요!

저의 이러한 발언이 괴변 같습니까?

그러나 괴변이 아니라 변명을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말고 사제들만이라도 자기들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그 것을 채워드리지 못하는 그 점이 저 같은 사제들의 항상 남은 숙제이자 항상 다 하지 못하고 신자들을 실망시키는 그런 연약하고 결점 투성이인 인간들일 뿐인 그 수준에서 여러분들의 사제로 나섰으니 민망할 뿐이며, 사제로 산다는 것이 늘 용서를 청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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