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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신부(?) - 할머니 묵주 기도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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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1-11-18 ㅣ No.26489

+찬미예수님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지요? 남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그런 제목을 고른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요.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 10월 어느날, 신부된지 6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을 맡게되었습니다. 서품 받고서도 계속 유학생활을 하는 통에 보좌 연한이 다 지나서 곧바로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주임이 된 것은 좋았지만, 본당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주임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걱정과 염려가 많았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신자나 신부나 마지막으로 기댈 분은 오직 그분 한 분밖에 더 있습니까? 미사 중에 기도 중에 그저 대과 없이 본당 신부 생활하게 해 달라고 청했지요. 그런데 기도하다가 졸지에 ’바람난 신부’가 됐습니다.

 

  저는 묵주 기도를 산보하면서 바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학교 때 저녁 식사 후 묵주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있는데, 보통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운동장이나 학교 주위를 거닐면서 기도를 바치지요. 그래서 신부된 후에도 산보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습관으로 남게되었습니다. 본당에 가서도 저녁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해서 본당 마당을 거닐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임받은 본당은 지대가 좀 높아서 성당 밑에 있는 주택가에서 본당 마당이 다 보입니다. 제가 부임했을 때가 늦가을, 낙엽이 지는 계절이었어요. 성당 바로 밑에 사는 신자들은 젊은 본당 신부가 낙엽이 우수수지는 가을 저녁에 마당을 오락가락하면서 뒷짐 지고 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면서 좀 처량하게 여겼나봅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몇몇 사람에게는 처량하다 못해 고민하는 듯 보였고, 신부가 고민하면 여자 문제가 대부분인지라 ’혹시 우리 본당 신부님이 여자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른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추측과 억측이 발전을 해서 ’새로 온 본당 신부님이 여자 때문에 고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던 할머니들 몇몇이 그룹을 이루어서 저를 위해서 열심히 묵주 기도를 바쳤답니다. ’바람난 신부’의 회개를 위해서 할머니 묵주 기도 부대가 조성된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사실을 본당에 있을 때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 본당을 떠난 후 청년들이 놀러와서 얘기하는 바람에 알게되었어요. 그 얘기를 들을 땐 ’그런 일이 있었어’하면서 그냥 웃어넘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약한 사람들이네, 신부가 기도를 해도 그런 못된 소문을 내다니...’

 

  며칠 지난 다음에 몇몇 신부님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중에 이런 얘기를 했더니 신부님들이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정말 여자 때문에 고민했던 것아냐?’하면서 한술 더 떠서 저를 약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냥 우스개 소리로 넘어가려 했는데, 옆에서 식사하고 계시던 연세 드신 신부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손 신부, 그렇게 생각할 것 아냐. 그래도 그 할머니들이 기도해준 덕분에 그나마 본당 신부 생활 큰 일 없이 마친줄 알어. 그러니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고맙게 생각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번쩍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비록 오해로 인해서 날 위해 기도를 했지만 그 기도 어디 가겠어? 하느님이 날 위해 좋은 데 쓰셨겠지’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신부는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산다는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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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어떤 분이(그분이 올린 글을 미루어 짐작컨대 연세도 지긋하시고 본당에서 오랫 동안 사목 위원, 총회장 등을 역임하신 것 같더군요) 자신이 만났던 성직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들을 집중해서 거론하신 것을 보고 논란이 많군요. 그분의 글을 죽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기분이 아주 나빴습니다.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얘기해야 하나? 물론 단골로(?) 물의를 일으키는 신부님들, 신자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의 말을 많이 듣는 신부님들 계시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저도 그 중의 하나일까, 하나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신부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냐, 왜 일부 신부들만 꼬집어 내서 그들이 전체인양 얘기하느냐, 왜 모범이 될 만한 신부님들은 그야말로 아주 극소수로 거론하고, 흉과 허물이 두드러진 신부님만 얘기하느냐,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신자들에게 상처 입은 신부들도 많지 않느냐, 뭐, 이렇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다음의 생각을 하면서 기분 나쁜 감정을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 우리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기대를 했으니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 비판을 한다는 것은 기대가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니겠나?

-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신부들에게 상처입는 신자들이 많은가보다, 신부들을 변호하기에 급급하기보다 우선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 기분을 상하게 하는 글이지만, 정말 잘 좀 해달라는 의미로, 신부님들의 위치가 중요하니 부디 그것을 잘 깨달아서 본래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격려성 발언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요.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지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잘못이라도 크게 부각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 신부들이 잘 해야겠지요. 이번 시노드 설문 결과도 그렇더군요. 신부님들이 잘 해야 교회가 바뀔 수 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는 뭔가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네요. 위에서 언급한 제 체험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부 비판이나 험담을 해도 좋습니다. 너무 속을 부글 부글 끓이느니 보다는 ’뭐, 저런 신부가 다 있어’하고 한마디 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흉 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신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세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서 자신을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셨습니다(루가 23,34). 때로는 어떤 신부님 때문에 마음 상하고 그래서 미운 마음, 더 나가서 증오의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요. 얘기를 해도 도통 먹혀들어가지를 않고... 그럴 때 밉더라도 예수님 모범을 따르면 어떨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이 원수 사랑의 가르침의 적용 대상이 사제가 되기도 한답니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부드러움입니다.

농사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겨울철의 추위가 꼭 필요하지요. 왜냐하면 땅 속 병균이나 벌레가 죽어야 다음해 농사에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씨앗을 싹트고 자라게 하는 것은 부드럽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굳어진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봄바람 같은 훈훈함입니다. 장 발장이 변화된 것은 그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면서 법대로 처리하려던 자베르 형사가 아니고 밀리에르 주교의 자애로움이었습니다. 장 발장이 교도소에서 나온 후 주교님 댁에 하루 묵은 후 새벽이 값나가는 은그릇을 훔쳐 도망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왔을 때 밀리에르 주교가 도둑 취급 하지 않고, ’그것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다’라고 말을 해서 장 발장을 놓아주었던 것입니다.

 

  사제가 잘못했을 때 겨울 추위에 견줄 수 있는 직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냉정한) 직언만으로 사제들이 바뀌지를 않더군요. 신자들이 못난 자신을 위해서 한결 같이 마음 써주고 아껴준다는 것을, 신자들의 따뜻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변화가 되더라고요.

제가 ’성직주의 단상’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기분은 상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언급된 것들을 쓴 약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솟아오르는 어떤 저항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로 따뜻함의 결핍이더군요. 제가 잘못 읽고 해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필자분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야 있으셨겠지만 인생 경륜도, 신앙의 연륜도 많으신 분이기에 다른 무엇을 기대했었습니다. 연세가 드셨으니 어쩌면 동생 같고, 어쩌면 아들 같은 신부들의 부족함과 흠을 보고 언짢아하면서도, 조금은 다독거려주는 여유로움(예를 들자면: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렇겠지, 좀더 신부생활하면 나아지겠지"), 조금은 감싸주는 넉넉함("저 신부 성질이 괴퍅해서 욕은 많이 먹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이런 저런 점은 장점도 있어", 혹은 "참 이해 못할 행동을 했다면 뭔가 사정이 있는 것 아니야?")을 기대했지요. 또 신앙 생활을 오래 한 분으로써 그 어떤 담담함("하느님은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분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을 더 주시는 분이니, 사제들에 잘못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우선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행하자")을 바랬습니다.

모르겠어요. 그분이 제가 생각하기 보다 험한 꼴을 너무 보셔서 그럴 수 밖에 없으셨는지... 혹은 제가 신부이기에 다른 신부들을 너무 감싸는 눈으로 봐서, 가재는 결국 게편이라서 그런지 말입니다. 누구를 비방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비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써 솔직한 느낌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신자들의 비판을 듣고서 신부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참조하시라고요.

 

마지막으로 얘기 하나 더 하지요.

   독일의 어느 성당 초등부 주일 학교 교실에서 실제로 있어났던 일입니다. 신부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지팡이를 짚고 양떼를 이끌고 가시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착한 목자에 대해서 한참 설명을 한 다음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신부님은 누구를 닮았지?" 물론 그 신부님은 "예수님요"라는 대답을 기다렸겠지요. 그런데 어뚱한 대답이 나왔지요. "개요!" 왜냐하면 그 그림에는 양떼들 주위에 양떼를 몰아가는 개 몇마리가 그려져 있었거든요.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신부님들은 예수님을 돕는 그 개들로 비춰진 것이지요. 그래서 신부가 졸지에 개가 됐습니다.

   지금 어떤 신부님 때문에 속상하고, 성질나고, 그래서 아예 딴 성당 나갈까?, 이 참에 좀 쉴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해보세요. "에구, 그 개같은 성질하고는..." 하지만 그 신부님은 물론 다른 신부님들도 목자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충견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것은 잊지 마시고요. 개가 되면 어떻습니까? 주인님 곁에서 그분 뜻에 충실하면 되는거지요. 뭐.

 

 그러고 보니 오늘이 평신도 주일이네요. 평신도로 시작된 독특한 역사를 지닌 우리 한국 교회, 그러면서도 성직자들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선배 조상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성직자와 평신도 서로 화목을 이루는 가정적인 본당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고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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