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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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종신부죽음의 의미-5,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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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익 [hrights] 쪽지 캡슐

2000-02-12 ㅣ No.8642

어젯밤, 오늘 오전에 모두 세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분은 박신부님이 함께하셨던 공동체에서 일하시는 분이고, 다른 한분은 신부님이었고, 마지막 전화는 박신부님과 매우 가까웠던 어떤 선배였습니다. 세분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제 글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셨고, 저는 전화통화를 통해 세분의 말씀에 대체로 수긍한다고 답했습니다. 제가 지난 며칠동안 썼던 글이 이곳에서 파장을 일으켰고, 그 파장이 제가 원래 의도했던 바와 달리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세분은 제게 전해 주셨습니다. 전화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는 박은종신부님에 대한 글을 그만 올리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올리면서, 제가 왜 박은종신부님 죽음의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했는지, 저의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증언하신 것처럼 박은종신부님은 보기 드문 강직한 분이셨고,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순결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정말로 강자앞에 비굴하지 않았고, 약자에게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박은종신부님에 대한 기억은 주일학교 학생들, 교사들, 장애인들, 본당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앞서 올라온 글중에서 삼각지성당 교사의 글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삼각지성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가끔 대학로를 걷다보면 신학생들을 보게 됩니다. 스님처럼 머리를 깍지도 않았는데, 한눈에 신학생임을 알아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구도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 특유의 어떤 향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땅의 사제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평신도들은 수도성직의 길을 가지 못하고(또는 않고) 있다는 것 때문에 컴플렉스를 갖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제나 수도자가 특정공동체에서 행사하는 권력의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진리에 대한 삶을 건 탐구의 자세, 남을 위해 사는 이타적인 삶이 부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평신도들에게는 그런 수도성직자들을 단지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건 어쩌면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 머릿속에 정리된 좋은 사제, 그렇지 않은 사제는 단지 제 기억, 또 어떤 이미지의 산물일 뿐입니다. 좋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든 그건 단지 좋고 싫음에 대한 기억일 뿐이지, 정밀하게 한 인간에 대해 탐구한 결과는 아닙니다.

어떤 성당이든 열심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평소 몸이 편찮으시다가도 성당에 가야할 때만 되면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저희 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에 한분입니다. 정말로 신심이 깊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 놓으며 하느님께로, 하느님께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성당이든 성당을 사유화하며, 토호화된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예수께서 질타하신 성전의 장사치들처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성당의 온갖 시스템과 심지어 사제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사제를 유혹합니다. 돈으로 골프로, 어떤 경우에는 무슨 근사한 정보를 들려주며 유혹합니다. 그리고 사제에게 "당신은 곧 떠날 사람"임을 주지시키며, 자신의 이익에 복무할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이런 요구는 그렇게 천박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지역 토호들의 성격이 교묘하고, 그들의 네트워크가 강고한 것만큼 매우 교묘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삼각지성당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향한 지역토호들의 집념은 올곧게 살려고 하는 한 사제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평신도 간부는 신부의 멱살을 잡기도 했고, 교구청에 쫓아가 말도 안되는 험담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소문을 낳았습니다. 저는 우연히 제 어머니께 "삼각지 성당 신부가 미쳤다며"라는 이야기를 박신부님이 삼각지 주임으로 계시던 때 들었습니다. 어머니께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다른 성당의 교우인 저의 어머니도 이렇게 한 사제에 대해 무책임한 말씀을 보태고 있습니다.

 

소문은 무서운 것이고, 소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저는 박은종신부님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 평신도들의 이기심이, 본당을 사유화하고, 사제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젊은 사람이 버릇이 없다" "성격이 이상하다"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쉽게 몰아세우고, 매도해버리는 풍토가 박신부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 사제들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어떤 사제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제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벅찬 감격으로 신학교 문을 들어서던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온통 내던지겠다는 강한 의지와 순결한 영혼 뿐, 다른 어떤 불순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공동체에서 사제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지 성사를 집행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자기 삶을 내어던지는 사람들이 없다면 교회공동체는 더이상 공동체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박은종신부님은 자신을 내던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의 순수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 사제생활을 통해서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삶을 통해, 그분이 철저하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내어 놓고 있고, 자신을 비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벽에 부닺쳤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지역 토호를 비롯한 우리 평신도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이든 본당공동체든, 또 사제든 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려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 성당에서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구하는 사람들, 성당에서 명예를 쫓는 사람들, 성당에서 단순한 심리적 보상만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 것은 눈꼽만큼도 내놓지 않으며, 이웃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 박은종신부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정말 예수처럼 살고자 몸부림쳤던 착한 신부님, 우리의 착한 목자를 우리가 죽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글을 쓰면서 박은종신부님 죽음을 둘러싼 몇가지 생각을 쓰다가 본질이 왜곡되게 해석될 수도 있는 일부 표현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장상이든, 교계언론이든, 또 다른 누구든 모두 이 죽음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제 생각에 종범이고, 주범은 우리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들이 사제를 성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정신병자로 만들기도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내일은 또 주일입니다. 내일 우리는 또 성당에서 우리의 사제들을 만납니다.

누군가 좋은 마음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니, 최소한 자기 멋대로 재단하며 사제를 밀쳐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박은종신부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들 모두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박신부님 죽음을 보고서도 회개의 기회를 찾지 못한다면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컴퓨터 통신에 익숙하지 못해서, 미리 다듬은 글을 올리지 못하고, 그냥 단박에 글을 쓰게 되면서 제 글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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