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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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복음을 3일 동안 영어성경으로 묵상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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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4-04-22 ㅣ No.171741

 

토요일, 주일, 오늘 월요일 사흘 동안 할려고 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요한복음 10장을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토요일에 무엇을 찾다가 영어성경을 보면서 봤는데 그게 우연히 주일 복음이었습니다. 지금 굿뉴스에도 나오는 영어버전 성경외에 지난 9월에 제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게 된 신부님께 부탁해 신부님께서 미국에 가셔서 알아보시고 아마존에서 책을 신부님이 따로 구매하시고 항공편으로 보내주신 가톨릭 버전 다른 성경이 있습니다. 모양은 일반 성경책이라는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커버는 견고하고 성경 같은 느낌은 없습니다만 종이 질과 인쇄는 아주 훌륭합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신부님께서도 저 때문에 검색하다가 사고 싶은 유혹이 있다고 하셨는데 사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포를 받고 나서 한번 신부님과 통화를 하긴 했습니다. 영상통화를 했는데 신부님의 사제관 같았습니다. 저는 원래 미국 가시기 전에 신부님께 우리 나라에서 보는 특대 성경 이런 게 미국에서도 있으면 그걸 부탁드렸는데 아무튼 제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holy bible입니다. 이건 개신교 버전도 있습니다. 저는 개종 후 개신교 버전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버렸습니다. 개종 후 지금 한국에 나와 있는 영어버전 말고 또 바오로서원에서 필리핀 버전으로 나온 성경도 출판했는데 지금은 출판을 하지 않습니다만 그 성경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바이블은 앱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 외에 공동번역과 다른 영어 버전 성경 몇 권을 참조하면서 보긴 봅니다만 확실히 좋은 점 몇 가지는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어서 그건 좋습니다. 또 같은 의미이지만 다양하게 표현을 해 좀 더 의미를 보완할 수 있어서 그런 점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표현 그 느낌을 다 담기엔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축해서 표현하다 보니 한 표현으로만 해야 하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걸 이번에 침묵의 힘을 번역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냥 책에 나온 그것만 번역하면 의미 전달이 이상해 어쩔 수 없이 부연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해서 설명을 추가한 경험이 있습니다. 성경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셔서 주일 복음인 요한복음 10장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사실 이 복음은 평신도보다는 성직의 길을 걸어가시는 분이 더 깊이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에제키엘서 34장도 같이 함께 묵상해야 진하게 묵상할 수 있습니다. 3일 동안 묵상한 것을 다 적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만 한번 서술해보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라고 호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제가 사제는 아니지만 가슴이 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눈물을 흘리시며 애간장이 녹는 듯한 느낌입니다. 미국에서 보내주신 신부님의 성경을 보았을 때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해봤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굳이 호소를 하시는 것일까? 당신의 권능으로 그렇게 하시면 되는데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데 능력도 있으시면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일에 사정이 있어서 다른 본당 새벽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성소주일이라 마침 그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성소에 응답하여 어떻게 신부님이 되셨는지에 대한 그 내용을 강론으로 하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주일 복음을 이 세상 모든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기엔 다소 부담이 되는 강론인 것은 틀림 없을 것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강론하시려고 한다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묵상하다가 찾고 싶은 강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강론이었습니다. 

 

몇 년 전 강론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다른 형식으로 변형을 해 누가 표절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형식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이 있긴 했습니다. 가슴 찡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좀 문학적으로 각색을 해 표현해보겠습니다.  "한 목자가 있다. 그 목자는 양떼를 돌봐야 한다. 양떼를 돌보기 위해서는 건강한 목자여야 한다. 한데 그 목자 역시 상처입은 목자이다. 어떻게 상처입은 목자가 양떼를 잘 돌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 목자라고 해서 자신이 온전한 목자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정도 선에서만 이렇게 표현을 애둘러 해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도 상처가 있어서 자신도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다른 목자로부터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는 한 마리 양과도 같은 처지인데 그 처지에서 목자인 신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목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성직자를 바라볼 때 그 목자가 주일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목자상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 기대치가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가령 이 상처는 우리가 성직자로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목자 역시도 온전한 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왜냐하면 목자도 역시 나약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설령 그게 상처가 된다고 해도 그 상처는 빨리 아물 수 있는 상처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똑 같은 목자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분 역시도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모르는 그분만이 안고 있는 상처의 치유를 받아야 하는 목자일 수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런 목자를 위해서 한 번이라도 사제를 위한 기도와 수도자를 위한 기도를 더 바칠 수 있는 신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겠지만 그저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는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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