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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3-6: 강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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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30 ㅣ No.1979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3) 강정 이야기 ①


제주, ‘세계평화의 섬’ 선포된 곳에 군사기지 건설하는 모순의 땅

 

 

나는 2002년에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제주에 오기 전 나는 서울 명동에서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았다. 그 시대의 명동이라 하면 젊은이들에게는 옛날부터 볼일이 없어도 괜히 한 번 바람 쐬러 나가 차를 마시거나 친구와 술로 밤을 지새우고 싶은 낭만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와 90년대 격동의 시대를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 나에게 명동은 매연과 취객들이 토해낸 오물, 식당마다 밀어낸 쓰레기 더미, 시위대가 던지는 화염병,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 가스가 범벅이 되어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사반세기를 보낸 이력을 감안해 주셨는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서울에서 제일 먼 남쪽 섬나라 제주도로 보내셨다. 제주에 오니 숙소 창에 보이는 광경은 꿈만 같았다. 북쪽을 보면 파란 수평선이 그어져 있고 남쪽을 보면 한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소임지에 나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복을 누릴만한 공덕을 쌓은 기억이 없는데 이런 특전을 누리게 하시니 너무 과분하여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얼마간 살다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만 한 제주도이지만 그 속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사람의 피와 고통과 죽음으로 멍들고 썩고 골병든 육신임을 알고는 이런 곳에서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이 아려왔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일별할 때 어느 지역이든 해방정국에서 좌우의 이념 갈등으로 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나, 제주는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지역이다. 제주인들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4·3’이라는 참혹한 사태로 인하여 도민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고 그 유가족들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요당한 침묵과 무너진 억장을 끌어안고 악몽과 트라우마 속에 신음하며 살아왔다. 4·3 사태 기간 중 제주에서 벌어진 참극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벌인 유다인 학살보다 규모와 인원으로 볼 때 훨씬 작기는 하여도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벌인 폭력과 무자비함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경찰과 군대가 제주 중산간 지역 마을들을 차례로 포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고 순박한 농부들을 좌익으로 몰아 노인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음을 알고 경악하였다. 제주교구 신자들과 사제들의 가정사를 들어보아도 대부분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4·3과 관련된 아픈 기억을 안고 산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 대다수는 이 땅에서 벌어진 참혹한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르고 살아왔다. 국가가 저지른 죄를 국가가 묵살하고 역사 기록과 서술에서 지워버리고 학교 교육에서도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안에서 동포들에게 자행된 이런 참극을 우리 자신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제주도에 관광객으로 놀러만 다녔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강정 평화 컨퍼런스와 평화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던 2014년 9월 27일 강정순례 참가자들이 강정마을과 한반도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강정포구 뒤편 해군기지 공사현장에 어지럽게 늘어선 대형 크레인과 구조물들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그런데 2005년 1월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하였고 제주에 내리는 비행기에서 제주 착륙을 알리는 승무원의 인사가 매번 ‘세계평화의 섬 제주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나는 국가수반이 제주도에 이런 별칭을 선포한 것은 과거 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비극의 역사에 대한 간접적인 반성과 회오를 깔고 앞으로는 차별과 억압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알아들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사사로운 개인적 소망으로 끝났다. 그 선언 이후 제주 땅에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단 한 줄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정이 내세운 유일한 전망은 평화를 브랜드로 내세워 국제회의 및 투자유치를 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추상적 상업적 구상뿐이었다.

 

그러다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는 38선에서 제일 먼 남쪽 작은 강정포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민주적이고 개혁적 정치를 하겠다는 노무현 정부가 왜 한반도 최남단 평화로운 제주의 작은 포구에 거액의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4·3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진상도 밝혀지지 않고 치유도 되지 않은 피맺힌 제주의 땅 주인들의 반발과 의사를 무시하고 거대한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군부대를 주둔시키겠다는 발상은 아직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제주인들의 마당에 또다시 피 묻은 군화발로 저벅저벅 행군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의 역사를 망각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정부로 인식하였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1월 제주를 방문한 기회에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4·3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삼가 명복을 빌기까지 한 사람이다. 육지 같으면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이 즉시 들고 일어나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고 저항의 연대를 꾸려나갔을 것 같은데 제주에서는 강정마을 주민들만 반대의 목소리를 올릴 뿐 제주 지역사회 전체의 반응은 너무 미약하고 소극적이었다. 필시 과거의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당한 폭력과 재앙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국책사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데 무의식중에 큰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그대로 가면 큰 저항 없이 해군기지 건설이 곧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을 보며 내 마음이 많이 산란해졌다. 국가가 세계평화의 섬이라 선포해 놓고 돌아서서는 평화와는 정반대의 군사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모순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북한과의 대치가 이루어지는 38선에선 제일 먼 남쪽 섬에 대규모 군항을 설치한다는 결정도 납득이 안 되고, 국가가 앞장서서 제노사이드에 준하는 민간인 집단학살을 저지른 땅에 주민들의 동의 절차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군사기지를 배치한다는 것도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폭거로 보였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 교회마저 침묵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가톨릭교회는 도대체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하고 있었나 하며 되묻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국가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새만금이나 평택 미군기지 같은 사례를 보아도 정부는 반드시 강행하고야 말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교회마저 제주도민의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에 치명적 악수를 두는 정권의 결정에 아무런 대응도 입장도 내세우지 않고 방관하고 있으면 교회는 후에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맛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가톨릭신문, 2024년 1월 28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4) 강정 이야기 ②


간절한 호소에도 기지 건설 강행… 생명평화 수호 끝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강정 문제와 관련하여 제주의 목자로 취할 선택을 결심하고 2007년 5월 제주교구민에게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며’라는 사목서한을 보냈다.

 

“제주는 4·3사건으로 무고한 생명 3만 명이 무참히 학살된 땅입니다. … 제주의 땅은 그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주의 땅은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어떤 이유로든 인간들이 형제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나 무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4·3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신 분들의 희생은 정말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사목서한에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 지적된 세계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사명을 알렸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항)

 

“많은 국가들이 보호책으로 삼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균형도 확실하고 진실한 평화가 아니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한다.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군비 경쟁이 계속된다면 그 수단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가공할 온갖 재앙을 언젠가는 일으키고 말리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야 한다.”(「사목헌장」 81항)

 

2016년 9월 제주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열린 ‘강정평화 컨퍼런스’ 참가자들. 군사기지와 군함이 버티고 있는 강정마을에 항의와 반대의 표징으로 세워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 사목서한 발표 후 교회 안팎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공감과 연대의 의지를 보내왔다. 제주교구 사제단은 해군기지 건설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을 감행했다. 여러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와 평화 활동가들이 강정을 찾았다. 그러나 제주교구의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정부 고위층 인사가 제주를 방문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고 대화는 평행선을 그었다. 정부 측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국책사업 특히 국가안보와 상관있는 군사기지 건설에 교회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데 대한 거부반응이 컸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확대될수록 제주 지역사회 안에서는 거의 꺼져가던 해군기지 건설 반대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강정 주민들도 큰 용기와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또 전국 각지의 시민단체들이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며 세계 각국으로 강정마을 이야기를 발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강정을 찾아 여러 날 머물다 가는 방문객이 늘었다.

 

2009년 5월, 나는 강정과 관련한 두 번째 사목서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한 호소’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나는 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재고를 요청하며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군비 증강은 평화를 결코 보장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역대 교종은 한결같이 군비 증강에 의한 평화 유지에 분명히 반대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는 교도권이 가르치는 교회의 사회교리에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한 국가가 무기를 보강하면, 다른 국가들도 더욱 크게 무기를 보유해야만 합니다. 또한 한 국가가 핵무기를 생산하면,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파괴적 핵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성 요한 23세 교종 「지상의 평화」 110항)

 

둘째, 도민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는 평화를 배우는 섬이 되어야 하며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주 4·3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두고두고 가슴을 치며 용서를 빌고 참회와 속죄의 발원을 하여야 할 피맺힌 역사입니다. 이런 제주 땅에 군사기지를 새로 건설하려는 것은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무위로 돌리고 그 무덤을 갈아엎는 행위나 다름없는 무지막지한 행위입니다. 제주를 총칼과 무력으로부터 정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인들의 희생에 늦게나마 참된 위로와 사죄의 제사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강정 앞 바다는 제주에서 가장 청정한 해역이고 제주도민의 생명의 젖줄입니다.

 

환경은 인류가 공유하는 공동선의 터전이고 모든 인간은 이를 존중할 의무를 지닙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백주년」 40항) … 강정 앞 바다에서 발견된 연산호 군락지는 그곳 해양 생태계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최근의 현지 탐사 결과 이곳은 군사기지 건설을 하기에 타당하지 않은 생태계의 보고로 밝혀졌습니다. … 그러나 행정당국은 이러한 탐사 결과도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할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이는 이 나라 전체에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청정해역을 회복 불가능한 형태로 훼손하는 생태계에 대한 폭력입니다.

 

넷째,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인하여 강정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고 주민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과 상호 적대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제주의 지역사회는 본디 서로 문을 열어놓고 한 집안처럼 오가는 독특한 친교의 문화를 이어오고 있으며 아직도 길흉사를 함께하고 끈끈한 정을 나누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행정당국이 주민들의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해군기지 건설 계획으로 말미암아 마을 공동체에 금이 가고 한집안 안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혐오하는 대결 관계가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상의 적에 맞서기 위하여 같은 마을 공동체에서 한 집안끼리 대립하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해군은 이런 호소에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정부와 제주도가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건설지로 확정한 이후 9년이 지난 2016년 2월 강정 해군기지는 완공되었고 한국해군과 미해군의 전함들이 수시로 정박하다 떠난다. 강정 기지가 완공됨으로써 강정 기지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자동적으로 종료되고 더 이상 동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군함이 정박하고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지만, 강정에는 여전히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마을 회복을 위한 평화운동이 9년째 지속되고 있다. 평화로운 어촌과는 어울리지 않는 군사기지와 군함이 버티고 있기에 오히려 더 이에 대한 항의와 반대의 표징으로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프코 센터)가 세워졌다. 프코 센터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여전히 매일 강정을 찾는 방문객들과 생명평화를 위한 길거리 미사가 거행되고, 인간띠잇기, 백배가 이어지고 활동가들은 콘크리트가 점거한 강정의 땅을 살리기 위해 땀 흘려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활동가들은 이제 활동가가 아니라 강정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지킴이로 살고 있다. 강정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다. [가톨릭신문, 2024년 2월 4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5) 강정 이야기 ③


강정을 지키며 ‘평화의 일꾼’ 된 아름다운 사람들

 

 

- 강우일 주교가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강우일 주교 제공

 

 

강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철만 되면 도저히 실현하지도 못할 허구의 약속을 대놓고 외쳐대다가 당선된 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들, 아니면 자신이 내세운 현실을 도외시한 공약에 발목이 잡혀 약속이행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밥상을 통째로 엎어버리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던 이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속물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발휘하며 금력과 권력의 종살이를 하는 학자들을 보며 실망한다. 한때 사법부에서 정의와 공정의 수호자로 처신하였으나 퇴임 후 유명 로펌에 영입되어 전관예우의 고속열차에 올라타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거액 연봉을 단기간에 챙기는 법관들을 보며 우리는 실망한다.

 

그런데 나는 강정에 다니면서 이런 이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 진실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세상에 빛과 희망을 엿본다. 강정 구럼비 바위 들판이 폭파되기 전 우리는 강정의 평화를 염원하며 바닷가 구럼비 위에서 강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야외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1월 한겨울 구럼비는 바닷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뚝 떨어져 너무나 추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장백의에 제의를 껴입었는데도 어찌나 추웠는지 손가락이 얼어들어 오고 아래위 치아가 딱딱거리며 마주칠 정도로 덜덜 떨려서 강론을 겨우 했던 기억이 난다.

 

- 미사를 주례하고 있는 강우일 주교. 강우일 주교 제공

 

 

100여 명 가까운 미사 참례자가 있었는데 그중 당시 그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재윤(스테파노) 형제가 미사 내내 함께 칼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켰다. 국회의원이라 미묘한 입장이었을 텐데도 그는 얼굴만 비치고 사라지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미사 후에 고마워서 다가가 인사를 하니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그는 야당의 언론정상특별위원장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감당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입법 로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누차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하였으나 재판부는 4년 형을 선고하였다.

 

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몇 차례 찾아가 면회하였다. 그의 얼굴은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맑고 청아함으로 빛났다. 나는 그의 무죄함을 의심치 않았다. 또 정권이 바뀌었으나 그는 풀려나지 않았고 2018년 8월 4년 만기를 다 채우고서야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제주에 오자마자 그는 나를 찾아왔다. 오랜 수감생활로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얀 얼굴에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출소 인사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시를 많이 썼고, 이제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2021년 6월 29일 그가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바로 그 전날 과거에 그에게 4년 형을 선고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감사원장까지 지냈던 판사가 대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거짓과 불의가 버젓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너무나 큰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항의하며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만난 정치인 중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강정은 많은 사람을 평화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는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인권, 통일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움을 벌여온 평화의 사도다. 전국 어디서나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이 있는 곳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던 문정현 신부는 강정에도 어김 없이 달려왔다. 주민들이 막강한 군대와 정부를 상대로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서둘러 강정에 이주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공사 현장 선두에서 젊은 경찰관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농성하고 버티었다. 앉아있던 의자 채로 공중 부양으로 들려 쫓겨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바닷가에 설치된 방파제용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포드 위에서 농성하다가 경찰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떠밀려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테트라포드 여러 개를 쌓아놓은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는 10m에 가까웠으니 노인이 그 높이에서 바닥까지 추락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병원에 달려가 보니 문 신부는 의식이 또렷했고 죽다 살아났다며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검사 결과 뇌에는 아무런 출혈이 없었고, 몸 곳곳에 골절과 타박상만 관찰되었다. 천사가 받아안고 땅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고 밖에 달리 상상할 수가 없어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문정현 신부는 평소 농담 반 진담 반 내게 주교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던 문 신부가 어느 날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주교관을 찾아왔다. 자신이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했다가 투옥되었으나 최근 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고 무죄가 선고되어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강정에 땅을 조금 샀다고 했다. 강정에서 평화 운동을 계속 펼쳐가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모이고 함께하는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겠기에 서둘러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땅을 확보는 하였으니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제주교구 주교가 추진해 달라는 것이었다.

 

-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우일 주교와 강정마을 주민들. 강우일 주교 제공

 

 

사실 이즈음 나는 나대로 지속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강정에 땅을 물색하고 있었다. 몇 군데 후보지가 나왔으나 마을 외곽이어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문 신부가 마을 한복판의 땅을 매입해 버린 것이다. 나는 교회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두 군데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낭비이니 문 신부의 제안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우리는 즉시 함께 건물의 성격과 용도를 논의하고 전국 여러 교구에서 모금을 전개하여 2015년 5월 현재의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완공하였다. 지금도 문 신부는 그곳에 기거하며 매일 길거리 미사를 봉헌하고 나무토막에 좋은 글귀를 새기는 서각으로 시간을 보낸다.

 

강정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밭농사나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다. 군사기지 건설이 강행되면서 이 시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막강한 군대와 경찰과 공무원들을 상대로 버티고 싸워야 하는 고달픈 나날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농부가 차츰 평화 활동가로 양성되고 성장해 갔다. 나는 해군기지 건설 기간 중 마을 주민을 대표하여 앞장서고 행동했던 강동균 마을회장을 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을회장이란 평소 동네 이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박한 봉사직이었으나 해군기지 갈등이 초래된 이후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비중을 띄게 되었다.

 

강동균 회장도 평범한 농부였으나 주민들을 대표하여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주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당당하게 정부의 공무원들 그리고 언론에까지 펼치는 평화의 일꾼으로 성장해 갔다. 해군기지가 완공된 후 군사기지 건설 반대 운동은 새로운 단계와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가톨릭신문, 2024년 3월 3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6) 강정 이야기 ④


이름없는 돌멩이들의 외침과 현존이 강정을 평화롭게 하리라

 

 

- ‘강정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지던 2016년 8월 1일 강우일 주교(왼쪽에서 두 번째) 등 참가자들이 약천사~안덕 구간을 걷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평화 운동가들은 제주 최남단의 작은 포구 강정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대형 해군기지의 이질적 형상이야말로 동북아의 평화를 저해하고 아름다운 제주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올무요 덫임을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생명평화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생명평화운동의 상징으로 강정에서는 해마다 제주도 해안가를 도보로 일주하며 평화를 호소하고 알리는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졌다. 나도 거르지 않고 이 행진에 함께 합세하여 걸었다. 행진 참가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해외에서까지 모여온 남녀노소 평화의 일꾼들이다. 이들은 긴 도보 행진 기간 내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호소하고 알리는 깃발을 들고 걷는다.

 

강동균 회장은 해마다 이 긴 여정 내내 가장 큰 깃발을 들고 꼿꼿이 맨 선두에 서서 걸었다. 불어대는 거센 제주 바람에도 큰 깃발을 똑바로 세우고 걷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강동균 회장은 교대도 마다하며 꿋꿋하게 걸었다.

 

그 밖에도 나는 강정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영화평론가 양윤모는 2011년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하다가 현장에서 크레인 차량 밑으로 들어가 공사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몸에 쇠사슬을 감아 연결하고 공사 현장에 트럭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결사적인 행동으로 막아섰다. 그 과정에서 다섯 차례 구속되고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고 단식을 이어가며 평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결연히 표현했다. 그는 2016년 제주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기획,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개최하며 문화예술계에 평화운동의 막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줄기찬 활동은 다른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과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강정에서는 지금도 길거리 미사가 매일 11시에 거행되고 있다. 미사 집전은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장인 김성환(콜베) 신부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는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맡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필요한 제구와 전례를 준비하고 미사 주송을 보고 묵주기도를 선도하는 역할은 정선녀(잔다르크) 공소회장이 한다. 그녀는 공사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현장에서 농성자들을 압박하던 경찰들 안에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작은아버지의 아들, 사촌 동생이었다.

 

집에서 마주친 작은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뭐가 잘나서 데모하니?” 그 후로 전에는 살갑게 대해주던 삼촌 내외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서로 마음이 편치 않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또 언니 아들 부부가 경찰이 되어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강정에 왔다. 조카 부부가 꼬박 1년 강정에서 근무했다. 캠코더를 들고 이모를 포함해 반대 농성자들을 채증하기도 했다.

 

잔다르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활동가들이랑 경찰이랑 대치 상황에서 서로 힘으로 밀기도 하다 보니 조카 부부가 욕도 듣고 몸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는 성녀 잔다르크처럼 강정의 긴 갈등의 역사 속에서 불굴의 굳센 투지와 깊은 영성과 복음적 온유를 잃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평화를 실천해 온 선교사다. 그녀는 지금 강정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마을을 안내하며 강정 평화운동의 역사와 체험을 전수한다.

 

그녀는 강정에 오기 전에 우도공소에서 10년 선교사로 살면서 공소 신자들을 동반하며 시간 날 때마다 우도 명물 땅콩 농사를 지었다. 그녀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엄청난 인내와 끈기로 땅을 살리는 일을 먼저 했다. 주변 농민들은 불가능한 짓을 한다며 만류했다. 처음에는 거의 열매도 달리지 않던 우도 토종 땅콩이 해를 거듭하면서 옛날의 고소함과 맛을 되찾아 갔다. 되살아난 옛날 땅콩의 맛을 본 이웃 농부들 입에서 절로 이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 맛이야!”

 

그녀는 지금도 강정에서 틈만 나면 밭에 가서 각종 채소를 가꾸며 돌보고, 감귤이나 딸기로 잼을 만들어 강정 생명평화운동의 재원에 보탠다. 진짜 생명과 평화를 수확하는 일꾼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농사는 비폭력 행동 중 한 방법이었어요. 생산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마늘을 다듬고, 들깨를 털고, 국화꽃을 따고 땅콩을 까고 바느질했어요. 시위도 농사도 내 삶의 일부예요. 땅콩 짓고 마늘을 심으면서 ‘생명과 평화는 사람이 스스로 키워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땅으로부터 배웠어요!”

 

그 밖에도 나는 강정을 거쳐 간 수많은 평화의 일꾼들을 만났다.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휴가를 강정에 와서 보내고 강정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열성적인 남녀 수도자들도 여럿 보았다. 멀리 미국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몇 번씩 온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농성과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고, 추방당하고 재입국을 거절당한 이들도 여럿이다. 이들은 강정을 세상에 알려준 평화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 말고, 이곳에 여러 해를 눌러앉아 강정을 지키는 놀라운 지킴이들이 있다. 출신 지역도 다양하고 전력도 참으로 다양하다. 광고업계에서 광고 만들던 사람도 있고, 춤 명상과 춤 테라피를 하던 춤꾼도 있고, 서양화가도 있고, 영화감독도 있다. 벌써 여러 해 강정을 떠나지 않고 매일 길거리 미사, 평화를 염원하는 100배, 평화의 인간띠 잇기에 참여하고 각자의 재능과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치며 평화의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보며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태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다. 오히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는 손가락질과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고향과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 조악한 의식주를 마다하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생명평화를 바라며 강정에 머무는 이들의 영혼과 활동에 나는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아무런 조직이나 규범도 만들지 않고 평화를 향한 각자의 노력과 선의를 존중하며 모든 종류의 상하관계에서 오는 차별을 거부하려고 사회적 직함이나 이름 사용을 마다하고 별명으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신기한 무리다. 이런 이름 없는 돌멩이들의 존재와 활동은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답다. 이 돌멩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평화를 만드는 디딤돌들이다. 이 돌멩이들의 외침과 현존이 오늘 강정을 평화의 기지로 만들고 있다.

 

내가 강정에서 만난 이들은 참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정화하는 빛이요 소금이다. 이런 의인들이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으시리라 믿는다. [가톨릭신문, 2024년 3월 10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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