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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우리 성인을 만나다14: 성녀 김 루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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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4. 성녀 김 루치아 성녀 김 루치아 “살려면 천주를 배반하라 하니, 무서워도 죽겠나이다”
- 윤영선 작 ‘성녀 김 루치아’
출 생 1818년 강원도 춘천시 강촌 순 교 1839년(21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동정녀
성모님처럼 고통의 길 택한 21살 동정녀
원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3월 25일이다. 올해는 성주간이 겹쳐서 부활 제2주간 월요일인 4월 8일로 옮겨 지낸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다. 당시의 관습으로, 처녀가 임신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돌팔매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모님이 답하셨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옛날, 첫 인류 하와의 불순종으로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은 내내 속세를 방황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성모님의 고백과 순종 때문에 잃었던 낙원(구원)을 되찾게 된 것이다. 성모님의 품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믿음이 부러워진다. 그런 믿음이 간절한 가운데 21살의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를 만났다. 성녀는 넉넉한 양반가에서 보장된 일신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성모님처럼 고통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여교우 6명과 수계 생활하다 스스로 자수
강원도 강촌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성녀 김 루치아는 어려서부터 교리를 익히고 수계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불과 14살에 동정 지키기를 결심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가산을 팔아 장례를 치르고, 6명의 여교우들과 같이 머물면서 천주를 공경하며 지냈다. 1839년(기해) 박해가 시작되자 스스로 자수하였다.
배교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판관의 고문과 회유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대하였다. “천주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니, 큰 임금이시고 아버지이신 분을 어찌 배반하겠습니까?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 “시골 백성이 임금님을 뵈어야만 믿는답니까? 천지 만물을 보고, 그것을 창조하신 대왕(大君)과 대부(大父)를 믿습니다.” “죽기는 무섭지만 살려 하면 천주를 배반하라 하니, 무서워도 죽겠나이다.” 김 루치아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믿음 때문에 무서워도 죽겠다는 그녀의 고백이 죽더라도 진리에 순종하려는 성모님의 용기와 꼭 닮았다.
성탄 구유 뒤 순백의 미소 짓고 있는 성녀
겨울이지만 햇살이 따뜻한 오후 1시경 서울 중림동에 위치한 중림동약현성당에 도착한 적이 있다. 약현성당 오른편에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199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축복하신 순교자기념관성당이 있다.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오~”하는 탄성이 나왔다. 인공조명을 켜지 않은 어둑한 성전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형형색색의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대 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성탄 구유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크지 않은 성전 공간이지만 마치 무한한 우주 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오 아기 예수님 경배합니다. 사랑합니다. 여기 이렇게 계셨군요.”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큰 별 위로, 어린 나이에 동정으로 순교한 김 루치아 성녀가 순백의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계셨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7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 0 6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