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거제도 신앙의 씨앗 윤봉문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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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7 ㅣ No.766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거제도 신앙의 씨앗 윤봉문 요셉

 

 

부산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이 지난 3월 부산시의 12번째 박물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윤봉문 요셉(1852-1888년) 순교자의 위장교리서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소학언해(小學諺解)” 안에 교리를 적은 위장교리서를 보면, 이 책을 갖고 다니면서 교리를 열정적으로 전하였을 순교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윤봉문은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양산과 웅천에서 살다가 필묵 장사를 하던 부친을 따라 1868년경 거제도로 들어갔습니다. 거제도에서 버드내, 밖개, 덕개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거제시 옥포2동 국산)에 정착하였습니다. 나중에 부친은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그는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남았습니다. 그는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 요한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아들 학송 루카와 딸 송악 가타리나를 낳았습니다.

 

1887년 겨울 경상도를 담당한 로베로(Robert, 金保綠, 1853-1922년) 신부는 거제도를 방문하여 윤봉문 요셉을 회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윤씨 형제의 노력으로 15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888년 봄 요셉은 옥포에서 통영 포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통영에서 심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몸값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는데도, 압수한 책들을 돌려주며 풀어주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하인들을 보내 그를 붙잡아 오게 하면서 100냥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그는 포졸들한테 끌려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돈을 요구하면서,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또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하였습니다. 그런데 돈을 준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부사의 체포령이라면서 찾아왔습니다. 이에 형 베드로가 관아로 끌려가 곤장 석대를 맞고 투옥되었다가, 이틀이 지나 읍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처음 요셉을 붙잡았다가 돈을 빼앗지 못했던 통영 관리가 다른 이들이 돈을 얻어냈다는 소식을 듣고, 통영의 통제사를 찾아가서 윤씨 형제를 체포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통제사가 거절하자 그는 영장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통제사가 자리를 비운 때라, 영장은 포졸들을 보냈습니다. 이에 요셉은 거제 지역 부사에게 호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은 약탈당했으며 소 22마리도 빼앗겼습니다. 이송 도중 신자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다로 몸을 던졌습니다. 갖은 노력 끝에 건졌지만 반쯤 죽은 상태였습니다.

 

영장 앞에 끌려간 요셉은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수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교를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자, “싫소. 나는 하느님을, 천지와 천인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소. 자기 부친이나 부사나 임금을 부인하는 사람을 뭐라 하겠소? 하물며 생사의 주인님을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영장이 처리여부를 묻자 대구 관찰사는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끌고 갔기에, 요셉은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습니다. “그것을 한문서적을 통해서 배웠는가, 아니면 한글서적을 통해서 배웠는가?” 하는 질문에 “한글을 통해서 천주교를 익혔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그렇다면 자네는 도둑일세. 도둑들만이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으니, 자네는 죽어 마땅하네.” 하였습니다. 요셉은 “거의 온 세상 모든 곳에서 따르는 종교를 따른다 하여 어찌 저를 죽일 수 있습니까? 임금께 여쭤보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제게 사형을 내리신다면 저는 제가 흠숭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1888년 2월 20일(음)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의 시신은 비라실[長在里] 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로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믿음을 위해 흘린 윤 요셉의 피가 거제도에서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1896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 족박골(足泊谷, 거제시 옥포2동)에 안장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거제도 신앙의 씨앗이 된 윤봉문 요셉 순교자의 굳건한 신앙을 이어받았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9년 1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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