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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6: 전례헌장 - 전례, 능동적 참여와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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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16 ㅣ No.430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 전례, 능동적 참여와 토착화


교회헌장과 계시헌장에 이어 이번 호에서 살펴볼 내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난 호까지 우리는 교회헌장과 계시헌장에 대해 우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사에서 볼 때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반포된 문서는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입니다. 이런 점을 우연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공의회의 전례에 대한 관심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사 안에서 살펴볼 때, 유럽에서는 교부학과 신비신학에 영향을 받은 ‘청년운동’과 ‘전례운동’이 이미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바가 있습니다. 이 운동들은 활기를 잃어 예식주의(Ritualismus)화 되었던 ‘전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불러 일으켰고,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결실을 맺기에 이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1. 전례 - 예식만이 아닌 삶과 긴밀히 연결된 교회 활동의 정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전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것은 전통에 따라 내려온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과 함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중세를 넘어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의 전례는 ‘홍주(rubrica, 전례서에 적혀져 있는 빨간 지시문)’에 따라 ‘교회극장’에서 거창하게 거행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예식이 거행되는 제단은 신자들과 동떨어진 특별한 공간으로, 전례언어인 라틴어는 주례자인 성직자와 복사 간에 주고 받는, 즉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신비스런 언어로 전례 안의 성가도 마찬가지로 신자가 아닌 전문 성가대원과 성직자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신자들에게 있어 전례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없는 더 나아가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점차 멀어져 갔고 궁극에는 이들의 삶과는 별개가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20세기 초의 여러 운동들과 신학들을 통해 이미 제기되어 왔던 이런 문제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전례를 근본에서부터 재고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런 재고작업이 단순히 무엇을 변화시키고, 적응시키는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즉 공의회는 뿌리부터 다시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전례를 고정적이고 법률적인 전망이 아닌 ‘역동적이고 신학적인 전망’에서 다시 바라보고자 하였습니다.

공의회에 따르면 전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복잡한 규정이나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우선 자신의 신비로운 몸인 교회에서 현존하고 행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요 행위입니다.(전례헌장 7)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활동이요 행위인 구세사는 역사 안에서 교회의 (성사적인) 전례 행위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는데(전례헌장 6),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모든 성사적인 것이 흘러나왔다는 데 그 연유를 두고 있습니다.(전례헌장 5)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구세사가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듯, 후대에서 전례적 기념으로 거행되는 파스카도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건이 아닌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전례는 예수께서 지상 생활, 특히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 업적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완전히 재현하고 실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실제로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고 동시에 그 안에서 인간 자신도 성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례헌장5-6) 따라서 전례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측면에서 인간의 행위라 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분인 하느님의 행위이기에, 전례는 응답적이며 대화적입니다. 신앙의 선조들과 대화하시던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계획은 예수님의 신비인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전례의 능동적 참여 - 예수님의 신비로운 몸으로 모인 하느님 백성 전체의 행위

그러기에 이 전례적 행위는 사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전례 행위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몸으로 모인 하느님 백성 전체의 행위이기에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 전체의 공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전례헌장 26) 그래서 공의회는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데, 전례헌장의 16곳에서 이런 점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 그 중요성을 잘 드러내줍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갖는 의미는 신자가 전례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열망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전례의 본질에서 기인되는 것, 즉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례 받은 모든 이가 함께 예수님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에서 기인함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자신이 받은 사제직의 권리와 의무로 인해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신비적으로 참여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전례, 즉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정점으로 체험하도록 해주는 전례에 대한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는 신자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길어 올리는 첫째(가장 중요한) 샘이 되어야 하며, 또 반드시 필요한 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례는 사제직의 수행으로 예배적 특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위이기에 양육적 특성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그 분 안에 일치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전례를 통하여 은총 안에서 양육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전례의 동참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전례에 합당한 내적인 준비와 함께 명시적인 참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전례헌장은 이에 대해 환호로, 찬송으로, 몸짓으로, 표정으로, 듣고, 보고, 침묵하는 형태(전례헌장 30)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전례를 장려하고 교육하며 실현시키는 일은 직무사제직으로 불린 사목자의 의무이자 주된 임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사목자들이 스스로 ‘전례의 정신과 힘에 완전히 젖어들고 전례의 스승이 되어야 함’(전례헌장 14)을 강조하면서, 사제직을 준비하는 이들부터 체계적으로 전례를 체득하고 지적으로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는 ‘전례적 양성’의 필수성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례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궁극적 일치를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고 그 기쁨을 미리 맛보는 친교의 장소요 그 친교를 배울 수 있는 학교입니다.(전례헌장 7,8) 비록 교회의 중요한 활동인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의 수행이 모두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제직의 수행인 전례 거행은 교회의 다른 어떤 행위와 비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탁월함을 갖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하기에 전례는 교회 활동의 “정점”이며,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 10)입니다.


3. 공의회로 시작된 전례의 개혁 - 전례의 토착화

전례헌장은 전례의 본성과 본질적인 특성을 다룬 후 ‘전례 개혁’이라는 세부적인 전례 쇄신에 대한 문제를 언급합니다.(전례헌장 21-40) 여기에서 미사, 전례력의 쇄신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 이면에는 ‘전례의 토착화’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지면상 광범한 이 분야를 모두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간략하게 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전례는 ‘자신의 신비로운 몸인 교회에서 현존하고 행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활동이요 행위’라 했습니다. 이를 토착화와 연결해 말하자면, 예수님의 그런 사도적 활동과 행위를 우리가 진정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역사 안에서, 우리의 문화 위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문제가 바로 토착화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전례를 우리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활동하고 계신 하느님을 어떻게 전례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토착화의 제일 원칙은 성경과 전통입니다. 바로 전례의 토착화는 원천으로 돌아가서 순수 신앙과 이를 바르게 표현한 방식을 배우는 것이요, 그 안에서 다양한 문화와 풍습을 소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23-27)

[월간빛, 2013년 4월호, 최석환 요셉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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