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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앞두고: 의제 개요의 배경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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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30 ㅣ No.220

[경향 돋보기 -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앞두고]


「의제 개요」의 배경 이해를 위하여

 

 

‘의제 개요’를 의미하는 ‘Lineamenta’는 ‘윤곽’, ‘개요’, ‘선’, ‘틀’이라는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흔히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앞서 나오는 것으로서, 앞으로 열리게 될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무엇을 논의할 것인지 주최 측에서 일단 윤곽을 잡아 지역교회에 발송하여 의견을 나누고 관련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한다. 그래서 「의제 개요」는 주제와 그에 관한 해설, 그리고 질의 문항으로 구성된다.

 

주제는 현재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와 관련하여 정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2년 10월 로마에서 열릴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를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로 정했다.

 

한때, 베네딕토 16세(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스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 발타자르, 한스 큉, 칼 라너와 함께 ‘쇄신’을 외치며 변화와 현대성, 개방성을 요구한 대표적인 진보주의자로 꼽혔다. 그런 라칭거가 오늘날 ‘보수주의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공의회의 ‘정신’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그의 ‘쇄신’과 ‘회복’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쇄신’파는 교회를 ‘근대화’ 하고 교회에 문화적 담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회복’파는 잃어버린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칭거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회복’을 지향했고, 그것은 리차드 맥브라이언이나 찰스 커랜과 같은 극단적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전통과 원천에 더 충실”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칭거는 ‘진정한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전통’과 ‘원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비로소 ‘쇄신’의 담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제 개요」는 현대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상황과 베네딕토 16세의 이러한 의도를 모르고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의제 개요」를 더 쉽게 이해하고자 ‘우리 시대’로 대표되는 유럽의 상황과 베네딕토 16세의 사목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직면한 시대

 

베네딕토 16세는 이미 추기경 시절에서부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경제성장, 세계화의 물결로 요동치는 분위기를 염려해 왔다. 그는 슈펭글러가 「서양의 몰락」(2권, 1918-1922년)에서 유럽의 종말을 예고한 것을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12권, 1934-1961년)에서 서구 세계의 위기는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있는 ‘영성화(靈性化)’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했다.

 

토인비는 종교보다는 기술과 민족, 군사력을 숭배하는 세속주의가 유럽을 위기로 몰고 갈 것이라고 진단했고, 베네딕토 16세는 유럽이 종교적이고 영적인 토대를 부정하는 데서 이러한 세속주의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보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공산주의와 같은 각종 이념에 맞서 싸웠다면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다. 두 교황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징표를 명확하게 간파하고 그것을 사목의 핵심 방향으로 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념의 장벽이 붕괴되면서 민주화가 도래하고 경제성장과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을 올바로 직시한 것이다.

 

베네딕토 16세가 바라본 유럽은 단순한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의 유럽 이해의 핵심은 유럽의 그리스도교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의 유럽은 지리적인 경계가 이동하는 것은 물론, 신념이 변하고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지면서 수많은 분야에서 혼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그가 느낀 유럽의 궁극적인 위기이다. 그의 ‘새로운 복음화’라는 용어 속에는 이러한 유럽의 모든 상황과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위해 교회를 총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포괄하고 있다.

 

 

“새로운 복음화”의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법은 대단히 아우구스티노적이다. 그가 1953년에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아우구스티노의 교회론에 나타난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집’과 교수자격 취득 논문 ‘성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을 관통하는 시선이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서 나타나는 방탕, 쾌락, 악습을 숨김없이 그리스도께 고백하는 인간과의 만남, ‘열정적이고 번민하며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의 만남, 비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한 목자와의 만남, 육신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우리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인격적 존재와의 만남에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토마스의 철학적 인간학을 20세기 중엽의 인격주의, 실존주의, 현상학 등과 접목시켰다면, 베네딕토 16세는 아우구스티노의 인간 이해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고 하겠다.

 

그가 보기에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삶의 현장에서 배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 존재의 상실은 환경의 변화, 상황의 다양화, 인간적인 조건의 부재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하락하고 존엄성이 실종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신앙을 통한 정체성 회복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입각한 신앙전수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새로운 복음화의 1차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근거로서 성경과 ‘교부들과 역사적인 사고(교회의 전통)’를 꼽았다.

 

베네딕토 16세는 현재 유럽에 만연해 있는 종교적 냉소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탈그리스도교화 현상은 ‘하느님의 외면화’와 “우리 안의 양들의 이탈”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거기에 무슬림의 유입과 9 · 11 사건 이후 날로 커지고 있는 테러의 공포는 유럽이 더 이상 ‘상호 존중’과 ‘인간 존엄’의 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를 ‘새로운 복음화’의 때(카이로스)로 보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가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를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로 정한 이유라고 하겠다.

 

 

새로운 기쁜 소식

 

베네딕토 16세가 내놓은 「의제 개요」 제2장에는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기쁜 소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메신저’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자체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탈그리스도교화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자신들의 양심을 건드리기 때문에 불편해 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속박이 아니라 살아있는 샘’(로마노 과르디니)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추기경 시절에 오랫동안 재임했던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은 자동적으로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국제신학위원회 의장직을 겸하는 자리였다. 그 시기에 교회의 힘든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새로운 「가톨릭교회 교리서」(1992년)를 내놓았다.

 

유럽이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독단적인 상대주의가 사회 규범으로 인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이슬람과 유다교에서 거부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재천명하고, 교리 내용의 전달을 신학자들과 사목자들의 ‘한물간’ 관점에서 나오는 진부하고 케케묵은 방식이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발표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깨달아 알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토론의 대상도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결단의 대상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 실재론은 가톨릭교회의 특징이다. 그것이 당시 독일, 미국, 이탈리아의 주교들이 나름의 교리서 발간에 공을 들이고 있던 시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서를 냈고, 그것에 대해 자신들의 시도를 막으려고 선수를 쳤다는 맹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냈던 이유이다.

 

라칭거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과 교리 분야에서 가장 확고한 인식’을 하는 것이었다. 신학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하며, 영성은 무엇이 되어야 하고 영속적인 유혹은 무엇인가 등 가톨릭 신학의 태도를 확고히 해야 했다.

 

현재 유럽 교회는 사제 부족, 신앙의 약화, 신앙 전파의 위기, 종교적 교양의 부재, 현대 세계에서의 언어적 부적응 등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의 활동이 자칫 원천을 망각하고 관용과 상대주의에 휩쓸릴 수가 있다. 라칭거는 바로 그 점을 우려했고, 그래서 ‘보수주의자’라는 이름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에게 원천은 로마서 12장 2절에 근거한 “시대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서 전례운동, 교부들의 재발견, 성경에 대한 새롭고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성경에 토대를 둔 전통교리를 고수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자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원천인 성찬례를 핵심이자 근본으로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이 시대의 창조적 소수자

 

베네딕토 16세가 교수 시절에 쓴 책 가운데 「그리스도교 입문」(1968년, 「그리스도 신앙 - 어제와 오늘」로 번역)이 있다. 사도신경(신앙고백) 주석서와 같은 것으로서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의구심과 불신 앞으로 담대하게 걸어가는 인간을 통해 신앙을 고찰하고 있는 내용이다.

 

베네딕토 16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소박하게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의 신앙 안에서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값진 보물은 ‘소박하고 진심으로’ 믿는 신자들이다. 신학자들은 책이나 보도에 등장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믿음에 반하는 일에 대해 신학적인 정교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신자들을 보호하며, 신자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베네딕토 16세는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창조적 소수는 그리스도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들이는 사람(마태 13,45 이하 참조)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추기경 시절부터 세상이 가톨릭계에 터뜨리는 다양한 형태의 핵폭탄과 해방신학, 마르크스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각종 신학적 도전들을 지켜보았다. 변화하는 유럽을 보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절감하였다. 진리를 가로막는 문화상대주의야말로 교회를 ‘근본부터 훼손’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다. 마치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가 정론보다는 정행을 강조하다 보니 무엇이 진리인지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른 채 믿음보다는 행동을 요구하듯이, 문화상대주의 역시 ‘상대주의의 도취’, ‘도덕적 상대주의’ 등으로 번질 소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유럽에 밀려들고 있는 이슬람 문화는 과거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정체성을 흔들고 도처에 테러의 위협과 분쟁거리를 키워 이전 세기에 겪었던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새로운 세계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그들은 유럽과 북미를 ‘알라의 땅’으로 만들고, 영국 헌법을 샤리아(이슬람 법)로 바꾸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교에서 십자가를 내리고, 유럽에 거주하는 무슬림 여성에게 현지의 법률이 아니라 이슬람 율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베네딕토 16세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펼친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관용이 과연 평화와 정의를 세우는 데 기여했는지, 현대 세계에서 문화상대주의의 이상(굊想)이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역사’는 문화적, 사회적, 인류학적인 역동적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힘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가 인간의 역사에 등장한 바로 그 카이로스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양식으로든 ‘창조적 소수’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는 바로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유럽의 정체성과 결부시켜 회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교회가 가진 모든 조직체(교구, 본당, 교육기관 등)를 가동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제 개요」를 읽고 나서

 

「의제 개요」는 한국교회에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세계화와 경제성장과 다종교 · 다문화 · 다민족의 상황은 한국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의제 개요」에 따른 답변서를 마련하고자 주제별 전문가와 교구 대표들을 주교회의에 초대하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시대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진단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실정에 맞게 「의제 개요」를 해석하여 답안지를 작성하여 제출을 앞두고 있다.

 

후에 「의안집」과 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에 우리의 답이 얼마만큼 반영될지는 모르지만, 「의제 개요」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이 사실은 우리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이 기회에 한국교회의 상황을 올바로 진단할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일찍이 단테는 「신곡」에서 “희망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지옥”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가치가 하락하고 자살 인구가 급증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유일한 희망의 징표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진리와 평화를 수호하는 강력한 인도자’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깊은 고심은 이런 교회의 책무를 인식한 데 따른 것이다. 언제까지 유럽의 정체성과 그리스도교를 연계시킬 수 있을지, 지지층이 급속히 얇아지고 있는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무신론, 이슬람, 신흥종교(또는 동양사상)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위험을 무릅쓰고 라틴아메리카의 민중과 아프리카의 문화와 동양의 영성과 연계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교황청이 언제까지 단죄할 수 있을지, 자체 분열하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가 ‘일치’, ‘쇄신’, ‘새로움’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을지에 대한 고심이 「의제 개요」 72개의 설문에서 그대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 김혜경 세레나 - 교황청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선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대우교수이며,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이다. 국제학술저서로 「샤머니즘과 한국교회」가 있고, 「일곱 언덕으로 떠나는 로마 이야기」(인문산책, 2010), 「세상을 향한 선교」(기쁜소식, 2010) 등의 저서와 「쇄신의 여정에 있는 새로운 본당」, 「동서양 문명의 만남」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11년 10월호, 김혜경 세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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