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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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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37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상)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만큼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는 성인이 없다고 할 만큼 그는 다양한 종교와 이념 그리고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태어났고 살았으며 그가 세운 수도원이 있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아씨시에 그가 죽은 지 7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매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참배객이 몰려오고 있다.

외적으로 왜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낡은 수도복을 걸치고 초라한 걸인 행세를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던 프란치스코가 오늘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그토록 깊은 감명을 주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면서 그가 가꾼 고유한 영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영성은 어떠한 것인가?


1. 성인의 생애

성인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 아씨시에서 1182년에 부유한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베드로 디 베르나르디네와 어머니 요안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곧 그의 이름을 「프란치스코」(프랑스인)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장사일로 자주 왕래했으며 부인을 만났던 프랑스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젊은 프란치스코는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언어 공부와 함께 신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아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다. 성격이 매우 활달한 그는 동네 청년드로부터 두목으로 지명되어 앞장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경제적으로 낭비하고 사치하는 방종적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그에겐 타고난 인정과 관대한 마음이 있어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며 자주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는 1202년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의 전쟁에 가담하여 싸우던 중 포로가 되었고 다음 해 두 도시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풀려나 아씨시로 돌아왔다. 그 영향으로 그는 얼마간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이 때에 그의 마음에 무언가 분명치는 않으나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205년 그가 23세 되던 해 다시 기사가 될 마음으로 갈티에르 브리에네 백작 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밤 스폴레토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이로써 기사의 꿈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왓다. 그 환시 중 듣게 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1206년 성 베드로 대성전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병환자를 만나 입맞춤 한 체험은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점을 이룬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희사를 하였고 자주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인도해 주시길 주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계씨를 받게 된다. 그 성당의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쳐야할 집이 그 소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집에 가서 귀중품을 팔아서 그 돈을 성당의 책임 신부에게 내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하였다.

이 사건 후에도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려는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아씨시의 주교에게 그를 데리고 가 그의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도록 하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돌려 받으려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요구를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아니했고 오히려 기꺼이 응하며 입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주교는 크게 감격하여 그를 끌어안고 걸쳤던 외투로 그의 몸을 감싸주었다. 그가 청빈을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길 원치 않았고 곡 필요한 의복도 되도록 남루한 것을 걸쳤다. 그후 1년이 지난 1208년 2월 24일 폴치운쿠라 성당에서 미사 참례 중 다음과 같은 마태복음 10,9-10의 말씀을 들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규범으로 주시는 계시로 받아 들였다. 『여러분은 전대에 금도 은도 동정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에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

그는 곧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리보트로트에서 기도와 노동을 하면서 극도의 가난 생활을 하였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하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그것이 너무 엄격하다고 여긴 교황 친노첸시오 3세는 처음엔 주저했으나 얼마 후 그 회칙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고 그들에게 설교할 사명까지 맡겼다. 그것은 교황이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게 되어 그것을 하나의 영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아씨시 근처에 있는 폴치운쿠라소 성당과 토지를 베네딕도 수도회로부터 얻어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복음말씀(마르 6,7-12 참조)에 따라 둘씩 짝을 지어 움브리아 지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그 구성원 수가 늘어나서 여러 곳에 분원들이 생겼고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아씨시의 명문가 출신 글라라도 프란치스코의 삶과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 곁의 집 한 채를 글라라에게 주어 뜻을 같이 하는 여성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고 그들을 위해 생활규칙을 만들어주었다. 이 수도공동체는 「글라라회」라고 불리는데 프란치스코가 세운 「제2회」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청빈 정신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형제들처럼 완전한 가난 생활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3회」를 설립하였다. 사회의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지 실천할 수 있는 회칙을 만든 것이다. 사제들을 포함하여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의 많은 신자들이 그 회원이 되었다.

1216년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몇 개의 관구로 나누었다. 그리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형제들을 선교사로 외국에 파견하기로 결의했고 분원들을 세우며 설교하도록 했다. 프란치스코는 순교를 열망하며 이집트로 가서 술탄과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개종시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인준되었던 「작은 형제회」의 생활 양식을 23장으로 증보 개정하여 승인 요청을 했으나 반송되었고 다시 보완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12장의 회칙이 드디어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준되었다.

1224년 그는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있길 청원하던 중 오상(五傷)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큰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심한 고통의 시련이기도 했다. 그러한 중에도 그는 설교를 계속하였고 몸은 날로 쇠약해졌다. 1226년 9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다가 온 것을 예감하면서 머물고 있던 아씨시에서 폴치운쿠라에 옮겨주기를 부탁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후인 10월 3일 저녁 무렵 그는 자신을 맨 땅에 누여 주길 요구했다. 십자가상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예수 수난에 관한 성서말씀을 읽게 하고 그것이 끝나자 시편 141편을 읊었다. 그리고 그가 지은 「태양의 찬가」를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는 이어서 죽음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하느님께 인도해 줄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채 안된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1999년 12월 19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중)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요청되었던 시대적 징표로서 그리고 카리스마적 존재로서 선 프란치스코가 영성사 안에서 기여한 점들을 살펴본 후 그의 고유한 영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성 프란치스코는 같은 시대에 살던 성 도미니코가 그러했듯이 수도회의 발전 자체보다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요구되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수도회를 세웠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성 도미니코가 성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프란치스코 형제여, 나는 당신의 수도회가 우리 수도회와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단 하나의 생활 방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도미니코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세운 두 수도회는 시대의 요청에 의하여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철저한 복음적 청빈의 실천과 설교 사도직 수행 등 유사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근본적인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 도미니코 보다 더 엄격한 청빈 생활을 추구하였다.

2)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누구보다 가난의 삶의 의미와 동기를 복음의 정신에 따라 영성적으로 정립한 분이다. 그는 가난을 가장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로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가난하세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연유한다.

3) 성 프란치스코는 당시 심각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던 교회의 상황에서 가난을 통한 복음적 생활에로의 회귀, 신앙에 대한 성실성,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닌 순종, 모든 계층의 회심을 촉구하는 사도직 운동을 전개하며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교회 안에서 정통성과 이단, 탁발승과 빗나간 개혁자들 사이에 선을 긋고 식별하기 힘들던 그 당시, 프란치스코의 신앙적 열성과 교회에 대한 올바른 자세, 그리고 기꺼이 실천하던 복음적 청빈생활의 모습은 교회 쇄신을 위한 시대적 징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4)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회는 공동체가 커감에 따라 사도직에 봉헌된 수도회에서 가능한 청빈의 정도에 관해 논란하기 시작하여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도 청빈의 엄격성을 좀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후에 수도회는 「규율 엄수주의자」,「공동체 중심주의자」및「엄률 영성주의자」로 나뉘었다. 1257년에서 1274년까지 총장이던 보나벤투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회 고유의 생활 양식에로 일치할 수 없었다.

긴 세월이 지난 후 1909년에 교황 비오 10세는 사도적 서신 「Saptimo jam pleno」에서 프란치스코 「제1회」의 세 분파는 「작은 형제회」,「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및 「카푸치노회」로 영구히 설립됐고, 세 명의 총장은 모두 세 수도회가 동일한 나무의 가지들인 만큼 성 프란치스코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5)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특징 중 하나가 「형제애」이것은 인간들과는 물론이며 자연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는 영혼이 없는 창조물과도 대화하며 화해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들 안에서 단순히 하느님의 흔적 뿐아니라 그분의 모상을 보면서 모든 사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실재를 느꼈다.

자연과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자 하던 프란치스코의 시는 환경 보호자나 단순히 자연사랑에 빠진 시인이 읊은 자연에 대한 예찬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우주에 깃들여 있는 신비로움과 거룩함에 대한 심오한 직관에서 우러나온 노래였다. 많은 것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알고 만나게 해주며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신앙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에게 모든 것은 형제자매와 같았다. 그는 그가 호칭하고자 하는 사물이 이태리 낱말의 성(姓)에 따라, 즉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형제 혹은 자메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남성 단어인 해를 「형제」라 불렀고, 달과 별은 여성이므로 「자매」라 불렀다. 불과 바람을 형제로, 물과 죽음을 자매라고 불렀다.

그가 아름다운 「태양의 노래」를 지을 때는 이미 눈이 거의 멀어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의 진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은 육안(肉眼)을 초월하는 영안(靈眼)이 아니겠는가.

6) 프란치스코가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중 받게된 오상(五傷)의 은총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성흔(聖痕)을 볼 수 있도록 뚜렷이 받은 최초의 경우이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은총을 받았지만, 프란치스코가 그 은총을 받은 첫 사람으로 알려졌다.

7)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영성가들과 달리 자신의 영성에 관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수도회칙과 몇 통의 편지, 유언장, 권고 등 일부의 글과 그가 말년에 하느님의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태양의 노래」가 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핵심적 특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선포 활동, 수난과 죽음, 부활 등 강생과 구원의 신비,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영성적 관심사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있어 근본적인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 절대적 가난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가난은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근본 바탕이고 그것과 긴밀히 연관되는 자세이며 삶인 겸손, 단순성, 기쁨, 순명, 노동과 애긍, 형제애 등이 그의 영성적 주축을 이룬다.


가난 : 그리스도의 삶 본받기

「가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프란치스코는 매우 간단히 대답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입니다』

그에게 가난은 복음서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가난의 삶이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난이다. 그에게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완성에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기에 앞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가 생활한 가난이란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충실성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그분이 지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께 좋은 것을 돌려 드리지 않고 남용하거나 소유할 때 죄를 짓는 것이다. 죄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소유 의식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이 그리고 인간공동체에 나눔의 길을 막는 것이다.

그의 회칙에서 『소유 없이』라고 표현한 내용은 물질적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선까지 포함한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외적 가난은 먼저 정신적 가난에 그 근거를 두는 것이며, 한편 외적인 재물에 대한 포기는 오직 복음적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가난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의 형제들의 생활 양식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 결과는 생계를 위하여 인간적 안전 대책이 없는 생활이다. 당시 종교적 관심이 줄어들고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과 함께 동냥을 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도적 삶을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개인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절대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공동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월 23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하)


프란치스코는 삶의 기쁨에 넓게 개방되어 있는 성인들 중에서도 특출한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화해를 통한 우주적 형제애를 이루면서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흔히 포기 또는 빼앗김이라는 부정적 색채를 띠었던 수덕주의도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포기한 것에 대한 「기쁜 극복」이란 적극적 측면으로 바뀌었다. 그의 생활은 뭔가 빼앗긴 삶이 아닌 기쁜 봉헌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사물들로부터 소유됨 없이 그리고 소유함 없이 단순성과 사랑의 눈으로 그것들을 직관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그의 영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겸손 - 가난의 자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가난은 모든 점에서 인간과 똑같은 신분을 취하신 그분의 낮춤과 겸손하심과 일치한다. 그래서 그는 이 두 요소를 함께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제1회칙 9 제2회칙 6 10)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 중 그분의 자기 낮춤과 겸손을 드러내는 가난을 무엇보다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의 신비에서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서 겸손은 내적인 가난, 마음의 가난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낮추려 하는 행동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 앞에 서서 하느님이 보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권고 19항 참조).

가난 자체도 소유 대상으로 삼을 때 교만으로 변한다. 프란치스코는 한 때 그의 수도회를 「작은 가난한 자들의 회」라고 부르려 했지만, 교만의 위험을 피하고 가난을 더 잘 보장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라고 하였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mitas)의 기초 위에 「작은 형제애」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작음」의 구성요소는 가난과 겸손이며, 「형제애」의 구성요소는 사랑과 순종이다. 작음은 가난과 겸손 위에 세워져 있는 복음적 마음가짐이다(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2,11-12 참조). 가난과 작음은 무엇보다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단순성 - 가난한 이의 지혜

단순성이란 우매함이나 무식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이의 지혜이고 겸손과 같은 차원의 덕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겸손이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내면적 자세라면 단순성은 자기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단순성은 이중성과 반대되며 하느님을 직관하는 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성이며 그분과 일치하는 기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단순성과 지혜가 같이 있을 때 형제들의 공동생활에서 많은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참으로 단순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자신의 실생활과 약점에 대하여 아무 것도 숨기려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단순성이 천성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자세로 사는 그에게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기쁨 - 가난의 열매

성인은 하느님의 종의 또 하나의 근본 자세는 기쁨을 간직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에서 오는 참 기쁨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여 얻으라고 충고한다.

그러므로 복음적 가난을 사는 작은 형제들은 슬퍼하거나 음울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지버하고 명랑하며 쾌활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래서 형제들은 나병환자들이나 걸인들과 함께 지낼 쌔 기뻐해야 하며 동냥을 청하는 일을 기뻐해야 한다. 가난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권고 27,3 참조). 결국 기쁨없는 가난은 참된 의미에서 복음적 가난이라 할 수 없다. 그레게 가난은 기쁨 속의 가난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고통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 고통으로 정화되고 양육되는 것이다.


순종 - 내적 가난의 극치

가난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생활 전부이다. 사랑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순종의 생활」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성부께 대한 순종의 삶으로 이해하였으며 육화와 죽음은 그 증거이고 그분의 순종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그에게 순종은 수도원의 규칙이나 요구나 공동 생활의 질서를 위한 조건이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회개 생활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그에게 순종의 일차적 동기는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선물을 바치는 데 있다. 성령께 마음을 열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려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순종생활을 받아드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수도회에 입회자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순명생활로 받아들인다」라고 표현한다.

프란치스코의 순종 개념의 핵심은 거룩한 자유이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순종과 자유 두 요소는 사랑을 목적으로 할 때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종과 가난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에 의하면 순종이란 내적 가난의 불가피한 요소이며 그 극치이다. 재물을 포기하는 것 보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권고 3,3-2 참조).


형제애 : 가난한 이의 사랑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인간은 직책이나 신분 차별 없이 서로 형제 자매이다. 또한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대자연 현상까지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소중한 형제 자매들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열려있는 우주적 형제애를 실천하였다. 그에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지들이며,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도구들이다.

성인의 형제애는 우선 그의 작은 형제회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모든 이들을 위한 형제들이 되기 위해서는 형제회 안에서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형제들은 다른 형제들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다(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유헌 14 참조). 그들의 형제애는 세상을 향한 형제적 관계로 이어진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직접 함께 생활하는 형제애를 추구했다. 그것은 가난하셨고 나그네이셨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는 것이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의 형제애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방인들과 이단자들도 포함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들을 대하며 관계를 맺었다.

프란치스코 만큼 대자연 앞에서 그토록 깊은 감수성을 드러낸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의 형제애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모든 피조물, 무기물까지 포함하여 관계를 맺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경관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그리고 사랑을 드러낸느 모습과 색채들의 축제이다. 그는 모든 존재들과 섬세한 애정으로 관계를 이루었으며 이성없는 동물까지도 자신들을 향한 그의 애정을 느끼며 놀라운 형제애의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인간이 행해온 자연에 대한 온갖 훼손과 파괴로 인하여 오늘 인간 스스로가 크게 위협을 받으며 큰 우려 중에 자연 환경보존과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긴급한 과제 앞에 놓인 우리에게 인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주적 형제애를 강조하고 실천한 성 프란치스코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환경보호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1979년 11월 29일)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톨릭신문, 2000년 1월 16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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