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연중 34 주일-다해-1998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8-11-20 ㅣ No.6

연 중  제 3 4  주 일  ( 다 해 )

<그리스도왕 대축일>

        2사무 5,1-3 골로 1,12-20 루가23,35-43

     1998. 11. 22.

 

오늘은 연중 34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39;왕(王)!&#39;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일반적으로 &#39;왕(王)&#39;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 즉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던 사람, 옛날 전제 군주시대의 정치 권력자를 먼저 떠 올립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사극(史劇)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임금 또는 왕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 첫번째 이유이고,  우리 모두 왕(王)이 될 수 있는 영토나 자리가 없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이 많은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말을 바꾸어 씁니다.  사용하는 말이 바뀌면 그 성질을 갖는 사람의 모습도 바뀐다고 생각을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무지막지한 &#39;왕&#39;이라는 말보다는 &#39;대통령&#39;이라는 말을 씁니다.  말이 바뀌기는 했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는 &#39;왕&#39;이라는 직책과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입니다.  아마 이 용어를 쓰다가 싫증나면, 수상이라든가 아니면 그보다 거부감이 적다고 생각할 새로운 이름으로 또 다시 바꾸자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 바뀐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39;그리스도를 왕&#39;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39;왕&#39;이라는 말은 세속의 그런 권력을 행사하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때때로 세상살이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판정합니다.  그래서 틀린 일들도 감정이 앞서면 틀리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고집을 꺾어야 할 것도 때로는 &#39;자존심&#39;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이유의 한가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 표현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가 부족한 언어를 가지고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이 쓰는 말에 감정을 상하는 일없이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했을 당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가리켜 만군의 주(=야훼 싸바옷), 임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군대의 주님이라고 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은, 자기 민족과 백성을 이끌고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러 갈 때에도 하느님이 함께 싸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권력만을 행사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옛날의 왕들이나 지금의 대통령은 싸움의 일선에 서지 않습니다.  뒤에서 결정하는 사람이죠. 대통령이나 왕은 수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그들에게 희망을 요구하면서도 일선(一線)에 서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잘못했을 때에는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활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그 자리에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 호칭과 자리를 인간에게 내어줍니다. 그 자리를 처음으로 차지한 사람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울&#39;이라는 임금이고, 훗날에는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는 오늘 연중 34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이 &#39;그리스도 왕&#39;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도 거부감 없이 신앙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려면, 성서에 나오는 말의 의미대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인간 가운데 제대로 된 `임금 또는 왕&#39;은 다윗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일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고 어려움과 곤란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해 버린 다음에도 끊임없이 자기 민족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다윗 같은 왕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 주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왕이라는 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왕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그리스도 왕은 요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바보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하여 12군단이 넘는 천사를 불러올 수 있었는데(마태 26,53)도 그저 묵묵히 잡혀가기를 선택한 바보, 5천명을 먹게 하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왕으로 받들어 모시려고 할 때에도 도망친(요한 6,15) 전력(前歷)을 가진 분이었으며,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을 살리고 감동시켰으면서도 십자가 위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그 기적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분(루가 23,39 참조)이 바로 그리스도 왕 입니다.  인간으로 보면,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고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르는 바보를 가리켜서 신앙에서는 `왕!&#39;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극(史劇)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왕, 소설책이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왕은 올바르게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렇습니다. 좋은 것도 좋게 쓰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위협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이렇게 잘못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좋은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전례력으로 1998년을 마감하는 이번 주간을 통해서 우리가 찾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이요, 그 주제입니다.  

 

연중 34주간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정한 성서주간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39;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에 참여할 수 있을 것(골로 1,13)&#39;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왕 예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교회의 정신에도 일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정신에 따라 바르게 살 수 있는 은총을 함께 간절하게 청해봅시다. 이것이 한해를 마칠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71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